(132)|자유당 내각(25)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이승만통치에 대한 비관의 하나가 인사행정에 대한 정파의 불만이다.
인사를 둘러싸고 파쟁과 모함이 끊이지 않았다. 국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던 국무총리 지명은 거의 예외 없이 비토를 당했다. 장택상총리의 후임인사도 마찬가지였다. 52년9월30일 장총리가 고시진사건으로 물러난 9일 만인 l0윌9일 대통령은 이윤영을 총리로 지명했다. 이씨는 초대내각 이래 세 번째 총리지명을 받은 것이다.

<이윤형도 비토>
이때는 자유당이 69석으로 늘기는 했으나 원내 안정세력에까지는 이르지 못했던 때다.
국회표결결과는 재선 l백66중 가35 부1백28 기권3으로 승인 거부였다. 자유당마저도 대통령의 지명을 보이코트한 것이다.
총리 지명때마다 거의 예외없이 되풀이되는 국회의 거부권 행사에 대통령도 짜증이 났던 모양이다.
국무회의에서 총리를 추천해 보라고 했다. 장관제청권을 갖는 총리를 장관들더러 추천하라는 얘기였다. 이렇게 해서 헌정사상 꼭 한번 국무회의가 국무총리 추천을 의제로 해 회의를 했다. 대통령이 참석치 아니한 국무회의에서 총리감에 관한 얘기가 오가다 무기명 비밀투표로 추천키로 했는데 33인의 한 사람인 이갑성이 다수표였다.
대통령은 국무화의 추천을 받아들여 국회에 인준을 요청했다.
그랬지만 이갑성도 인준이 어려웠다.
이때 신라회의 서인환의원이 또다시 거부될 인준안을 표결해 처리하지 말고 대통령과 면담할 것을 제안했다. 이렇게 해서 1월18일대통령과 국회 각 정파 대표간의 회담이 이루어졌다.
국회대표들은 총리의 장관제제권을 존중해주도록 요구했고 대통령은 총리가 정파를 초윌해 장관을 추천한다면 양해사항으로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그런데 국회는 이 같은 합의사항을 대통령이 담화형식으로 공약해 줄 것을 요구했고, 대통령은 정부인사에 관한 사항을 담화로 낼 수는 없다 해서 합의는 백지화되고 말았다. 이갑성의 총리인준도 물론 부결되었다.
사실 이대통령은 총리의 각료제청권을 단 한번도 존중한 일이 없다. 인사행정에 관한한 대통령은 자기대로의 독특한 선정기준이 있었다. 대통령의 인사행정을 가장 오랜 기간 가까이서 지켜본 이가 국무원사무처장을 지낸 신두영씨다.
감사원장을 끝으로 야에 묻혀 지내는 신씨의 회고.
『이박사는 대통령중심제 아래서의 총리제는 유명무실한 것으로 생각했다. 사실상 당시 국무총리란 실권이 없는 형식상의 자리였다. 국회는 이런 사정을 잘 알면서도 국무총리에게 중요기본정책들에 대한 것을 묻거나, 정책전환 용의를 묻기 일쑤였는데 총리는 결정권이 없으면서도 체면상<대통령에게 물어 보고 답변하겠다>고 할 수 없어 우물우물했다.
국회의 대정부 질문 때도 장관들은 의원들의 집요한 추궁을 받기 일쑤였으나 아무리 의원들이 <장관직을 물러날 용의가 없느냐>고 물어도 이 문제에만은 답변을 뜻했다.
그 이유는 이박사가 장관을 그만두겠다는 소리를 무척 싫어했기 때문이다. 이박사는 국회가 뭐라 하든 장관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것이라고 했고 거기에 대한 간섭은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능하면 협잡꾼>이런 이박사였으니 총리의 장관제정권을 인정하는 담화란 어림없는 얘기였다. 흔히 이박사의 인사행정을 정실인사라고 혹평했다. 신씨의 견해는 그건 당치도 않다고 말한다.
『정부수립초기엔 인재를 구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해방 전에 다소라도 행정의 경험이 있는 사람은 친일파 소리 때문에 고개를 들지 못했고 설령 경험이 있어도 미국과의 관계에서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인물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정치경험이 있는 사람은 더구나 없었다. 따라서 이박사는 자기가 전에 알고 있던 사람들을 정부각료에 임명하게 되었는데 미국과의 관계 등을 고려하다보니 거의가 미국유학파들이었다.
장관으로 임명된 사람들도 정부에 일정한 인사원칙이 있을 리도 없어서 개인이 아는 범위 안에서 사람을 구해 쓸 수 밖에 없었고 그러다 보니 정실인사가 되었다. 이박사에 대해 「외교에는 귀신, 인사에는 등신」이라는 잘못된 평가를 내리게 된 것은 인사를 잘못 했다기보다 인재난이라는 당시의 사회현실 탓이다.
정부수립 후 1년쯤 지나서 내무부 각도의 과장들이 모여 인사행정에 대해 의견을 나눴는데 의견의 일치를 볼 수 없었다. 그러자 김효석내무장관이<착한 사람은 무능하고 조금 유능하다 싶으면 협잡꾼이니 착하고 유능한 고르기 어렵다. 따라서 착한 사람 중에서 사람을 고르려 하지 말고 가운데서 비교적 나은 골라라>고 지시했다. 초기 인사행정의 고충을 짐작케 하는 일화다.

<「인물 추천함」설치> 이박사가 인물추천함을 만든 것도 궁여지책에서 나온 것이다. 인물추천함제도는 결국 실패했지만 오늘처럼 엘리트가 많은 때와 당시를 놓고 같은 기준에서 얘기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박사외 초기인사는 이렇듯 미국과의 관계, 행정경험자를 찾는데 어려움을 겪었고 중기 이후에 들어와서야 사람을 골라서 쓸 수 있었다.
이박사는 중요한 직책을 맡길 때는 상당히 고심했다. 여러사람들에게 인재를 추천하도록 곧잘 의뢰했다. 이박사는 한 인물에 대해「긍정적 추천」 과 「부정적 추천」두 가지가 있어야 발령을 냈다. 이박사가 신임할 만한 사람으로부터는 긍정적 평가, 싫어하는 사람으로부터는 부정적 평가를 받아야 그 사람을 기용했다.
이박사가 인사에 고심한 근본적 이유는 무엇보다 사람을 모른다는데 있었고 다음으로는 미국과 접촉이 가능한 사람을 고르려 했기 때문이다. 이박사는 인재를 추천 받기는 했지만 임명은 언제나 혼자서 결정했다. 그리고 이름만 쓴 메모를 내려보냈다. 그 때문에 실무진에선 사람을 몰라 난처했던 일이 여러 번 있었다.
재무장관을 지냈던 김현철씨가 그전에 기획처차장으로 임명될 때의 일화다. 하루는 경무대에서 김씨를 기획차장으로 발령을 내라는 지시가 있었다. 이박사는 반쯤 찢은 통신지 뒷면에 한글로 「김현철」 이라고 써서 비서를 통해 나에게 주었다. 그런데 막상 발표를 하려는데 아무도 김씨를 아는 사람이 없었고 이름조차 들은 일이 없다고 했다.
하도 답답해서, 김씨가 미국에서 온 사람이라는 얘기만 얻어듣고<그렇다면 반도호텔에 묵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호텔로 찾아갔으나 거기에서도 김씨를 찾을 수 없었다. 수소문 끝에 겨우 한자 이름과 간단한 이력을 알아내 기자들에게 발표는 했지만 이런 수소문을 하러 다니느라 인사발령이 며칠 늦어졌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