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사후백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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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청년 「카롤·마르크스」는 학생시절 시를 썼다. 시인이 될까보다 하는 생각도 했다. 사실 그의 핏속엔 지인의 재능이 흐르고 있었다. 어미니는 시인「하인리히·하이네」의 먼 친척이었다.
그러나 명망높은 변호사며 유대교라비(율법박사)인 그의 아버지「하인리히·마르크스」는시를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네가 엉터리시인이 된다면 나는 슬퍼할 것이다』는 말까지 했다.
「카롤」청년은 아버지의 충고롤 들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아버지롤 존경, 늘 사진을 갖고 다닐 정도였다.
줄줄이 학자로 대를 물려온 집안, 독실한 유대교도. 「카롤」은 그런 가정의 4남5녀중 차남이었다. l818년 5월5일 프로이센령 라인란트의 고도 트레베스생.
학생시절은 본과 베를린대학에서 역사와 철학전공, 「헤겔」에 심취. 23세때 예나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람하는 「카롤」아, 와인과 코피를 너무 마시지말고, 후춧가루가 진한 음식은 피하고, 담배도 피우지 말고, 일찍 자고 일쩍 일어나거라』
그의 어머니가 메를린대학에서 공부하는 아들에게 보낸 편지. 어머니의 심정은 동서고금이 따로없다.
「카롤」은 그때 헤비 스모커(골초)에 밤새우는 버릇까지 있어 새벽 2,3시까지 무슨 일이든 해야했다.
후일「카롤·마르크스」가 그의 사작『자본론』을 자평, 『그 원고를 집필할때 피운 담뱃값도 되지않는다』고 한 얘기는 유명하다.
25세때 재색겸비한 고급관리의 딸 「예니」와 결혼. 4세 연상의 여인이었다. 곁에서 「호머」 와 「셰익스피어」를 읽어주는, 「카롤」 에겐 누이같은 아내였다.
학업을 마치고 잠시 라인신문(라이니셰 차이퉁)편집인을 한일이 있었다. 그러나 독일정부의 언론탄압에 못이겨 파리로 망명.
그의 사상적 반려자인 「프리드리히·엥겔스」도 이때 만났다. 그는 브뤼셀로 전보, 한때는 모국으로 돌아갔으나 다시 추방.
런던의 생활은 그의 생애에서 다시없는 최악의 시절이었다. 가난이 무엇인가를 그는 뼈에 사무치게 체험했다.
세 자녀도 이때 잃었다. 그의 말마따나『궁핍 생활의 회생』이었다. 8세짜리 아들의 관을 살 돈이 없어 이웃에서 빌었다니까-.
불과 5년의 우정을 쌓은 「엥겔스」는 「마르크스」에겐 암흑 속의 촛불이었다. 「엥겔스」의 가정은 유복한 편이었다.
「마르크스」의 런던 망명 33년동안「엥겔스」는 그에게 정신적, 물질적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1867년4윌, 그의 나이 49세때 『자본론』 탈고. 「나는 이 저작올 위해 나의 건강도, 인생의 행복도, 가족도 모두 희생시켰다」
「마르크스」의 술회.
3월13일은 「마르크스」사후백년. 오늘 인류의 3분의1을 이념의 사슬로 묶어놓은 코뮤니즘은 바로 그의 「과학적 사회주의」에 기초를 두고 있다.
「윈스턴·처칠」이 영국 의회에서 이런 연설을 했던 기억이 난다.
「…사회주의의 타고난 선은 빈곤을 평등하게 분배하는데 있다」 런던시내 하이게이트 묘지에 묻혀 있는 「마르크스」는 지금쯤 아마 귀와 눈을 막고 『자본론』 개정판을 쓰고 있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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