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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한국 경계 "과잉"|경제격차 못지않는 인식의 격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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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나리따의 짐 검사>
일본 나리따공항에 내려 세관검사를 기다리고 있으려니 『외무성초청으로 한국에서 온 보도관계자냐』고 묻는다. 그렇다고 했더니 『연락을 받았다』며 가방을 열어보는 시늉만 하고는 그냥 가란다. 그러면서 『술은 더 없겠지요』하는 말을 잊지 않는다.
옛날 상당히 까다롭게 굴던 것과는 많이 달라졌다.
이게 일본도 경제대국으로서 자신을 갖기 시작했구나하고 생각했다. 그러나 유럽공항에서의 「프리패스」하고는 달랐다. 런던이고 파리고 로마고 공항에서의 짐 검사라는 것이 없다. 신고할 사람만 신고하라 해놓고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다. 일본은 아무리 초청한 사람이라도 보는 체는 한다.
그냥 프리패스 시키는 것과 보는 채라도 하는 것, 바로 이 차이가 오늘날 국제사회에 있어서의 일본의 좌표가 아닌가 생각했다.
물건을 만들거나 GNP규모에 있어선 일본은 분명히 선진대국이지만 사회의 「스토크」나 의식은 아직 크게 못 미치는 것이다.
일본보다 국제수지도 나쁘고 경제형편도 어려운 영국이나 이탈리아조차도 입국자들의 짐 뒤질 생각을 아예 않는데 일본은 아직도 보는 채라도 하지 않으면 마음이 안 놓이는 단계인 것이다. 이것은 어찌 보면 의식이나 문화적 격차라고도 볼 수 있다.
미국이나 EC와의 무역불균형을 일본에선 국제경쟁력의 결과라고 주장하는데 반해 구미에선 문화적 갭이라고 인식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페리」의 흑선에 의해 강제개국당한 후 1백여년간 각고면려하여 오늘을 쌓아올린 일본은 대국으로서의 마음가짐, 몸가짐에 덜 익숙해 있는 것이다.
고매한 이상이나 여유보다도 자신을 부단히 채찍질하는데 익숙해 있고 다른 나라에도 그것을 요구한다.
더 애쓰고 방어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조바심이 널리 깔려있다.
밖에선 나리따공항쯤 되면 이젠 의젓하게 프리패스시킬 때가 되지 않았느냐고 생각하는데 반해 일본인 자신들은 아직도 보는 채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갖은 고생과 채찍질 끌에 20만석정도의 다이묘(대명)가 되었지만 생각은 그에 못 따라가 고참 「다이묘」들로부터 질시를 받는 그런 처지가 아닌가싶다. 밖에서 보고 기대하는 일본과 자신들이 생각하는 일본과는 큰 거리가 있다. 이것이 국제사회에서의 여러 오해와 마찰을 불러일으키는 것 같았다.

<평행선적 한·일 관계>
한일간의 관계에도 같은 흐름이 지배한다. 일본외무성·통산성·기획청 등 정부사람들이나, 정계·재계사람들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비슷한 논리로 무장되어 있었다.
특히 일본의 정책결정에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관료군들의 의식은 철저했다.
한일간 인식의 차이가 이토록 클 수가 있을까하고 새삼 놀랐다. 정계나 재계는 다소 여유를 보였지만 의식의 바탕은 크게 차이가 나지 않았다.
아시아 지역의 평화나 균형발전, 또 호혜공영을 웃으며 강조하다가도 각론에 들어가면 정색을 한다.
『한일간의 무역불균형이 너무 심화되고 있다. 일본으로서도 이의 시정을 위해 성의를 보여야 하지 않는가』『물론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양국간의 무역규모의 증대에 비해선 격차가 줄어들고 있다. 65년에 무역역조가 3.7대1이었는데 비해 현재는 1.5대1 정도다.
무역불균형은 산업구조에 관련된 문제니까 단시일에 해결될 일이 아니다. 근본적으로는 한국이 산업경쟁력을 높여야하므로 양국이 장기적인 관점에서 해결해야할 일이다.』
『한국이 경쟁력을 높이려면 첨단기술 등을 도입해야하는데 이에 대해 일본이 협력해야 하지 않는가.』
『기술이란 주고받는 것이지 일방적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일본도 대가를 치르면서 구미로부터 기술을 배웠다. 일본은 1년에 미국에 기술로열티로 6억달러 이상을 주지만 우리도 l억달러 정도는 판다. 우리가 한국에 기술을 주고 싶어도 특허권이라든지 여러 복잡한 문제가 얽혀있어 마음대로 줄 수 없다.
첨단기술분야에선 일본 안에서도 여러 회사가 경쟁을 하고있는데 그런 분야이면 간단히 기술을 줄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얼마 전 일미통상회담을 하면서 미국대표가 농담으로 하는 말이 「전후 미국의 가장 큰 실수는 싼값으로 기술을 일본에 너무 많이 준 것」이란 말을 하더라.』

<성의와 무성의>
『양국간의 정상회담에 의해 40억달러의 경협이 타결되었지만 전통적으로 일본은 대한경협에 너무 인색한 것 같다.』
『한국도 마찬가지겠지만 일본도 어떤 정책을 결정하기까진 여러 단계의 협의를 거친다. 따라서 그쪽에서 보면 답답하게 보이겠지만, 이쪽에서는 필요한 절차를 거쳐 국민의 컨센서스를 모으는 것이다. 그걸 가지고 성의가 없다하면 곤란하다. 경협은 액수보다 실질이 문제다. 일본 속담에도 「처음부터 큰 아기를 갖기보다 작은아기를 낳아서 튼튼히 길러야좋다」는 말이 있는데 한일경협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시장을 너무 닫아놓고 있다. 심지어 한국의 1차 산품에 대해 갖가지 규제를 다하는데 그게 몇 푼 된다고 경제대국 일본이 그런 쩨쩨한 일을 하느냐』
『흔히 일본시장이 폐쇄적이란 말을 하나 그것은 다른 나라에서 뚫고 들어오는 노력을 덜하기 때문이다.
좀더 적극적으로 들어오기를 기대한다. 일본은 시장개방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의 인삼차에 대해 4월부터 관세를 인하할 작정이다.
양국관계는 어디까지나 호혜적이어야 한다. 최근 한국어선들이 일본연해에 와서 고기를 너무 많이 잡아간다. 우리는 너희 고기를 안 잡는데 너희는 너무 잡아가 일본어민들을 자극시키고 있다』
『그런 사소한 문제보다 양국간의 호혜발전을 위해 기술이전이나 자본협력 등에서 일본정부가 좀더 고차원적으로 개입해야 하지 앓는가』
『잘 알다시피 일본은 자유경제체제다. 따라서 민간에 대해 정부가 이래라 저래라 할 수도 없고 또 그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고 생각지 않는다.
기술이전문제도 정부베이스에서 해결하기보다 민간끼리 상업베이스로 해결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이 요즘 너무 발전하여 일본을 위협하니 조심해야한다는 분위기가 높다. 「부머랭」효과를 우려하는 사람이 많다』
대개 이런 식이다.
한일간의 근본적인 인식격차와 평행선적 입장을 실감있게 확인할 수 있었다. 여기에다 한일문제는 감정적 요인까지 겹쳐 더러는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번지는 것이 아닐까.
일본은 우리가 기대하는 대국으로서의 여유보다 경쟁상대로서 한국을 과잉 의식하는 것 같았다. 관민모두 위기의식이 높았다. 한국이 이미 철강·조선·섬유는 일본을 추월했고 다른 분야에서도 곧 뒤쫓아온다는 강박관념을 서슴지 않고 털어놓았다.
한국경제가 그토록 강하게 보이는가하고 새삼 놀랄 지경이었다.
1차 오일쇼크 후 일본은 기술혁신과 합리화투자에 총력을 경주하여 그 효과가 이미 나타나고 있다. 완전히 로보트로 움직이는 「파낙」공장이나 눈부시게 쏟아져 나온 새 전자제품 등을 보고는 좁아지던 한일격차가 더 벌어지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물흐르듯하는 서비스산업을 보면 잘못하면 88년 올림픽에서 우리는 곰 노릇이나 하지 않을까하는 불안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일이 도움 받아야">
그런데도 그쪽은 오히려 한국의 저력에 놀라고 있으니 정말 어리둥절할 지경이었다. 『한국이 작년에 물가 5%에 6%의 성장을 한 것도 놀라운데 금년엔 3%의 물가에 7.5%의 성장을 하겠다니 이것은 바로 경제기적이다. 온 세계가 불황에 허덕이고 있는데 한국이 그토록 첨예하게 좋으니 어찌 우리가 불안을 안 느끼겠는가. 일본은 철강회사들이 용광로를 끄고 조선소도 놀리고 있는 판에 한국은 철강공장을 하나 더 짓고 조선소도 크게 시설을 늘린다고 들었다. 또 한국은 OECD에 가입할 준비를 하고 있다니 정말 놀랍다. 우리가 도움을 주기는커녕 도움을 받아야할 형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정색을 하고 말하는덴 말문이 막혔다.
우리가 안에 있어서 우리경제의 저력을 못 본 것인지, 일본이 너무 과잉 경계하는 것인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분명한 것은 일본은 20만석의 대명이면서도 의식은 국제사회의 빈축을 살만큼 겸허한데 비해 우리는 이제 겨우 1만석의 대명이 되었는데 의식은 그보다 훨씬 앞섰고 그것이 바깥에 그대로 베어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찬란한 각종 통계를 들이대며 한국경제가 이토록 좋은데 어렵다니 말이 되느냐고 하는덴 정말 할 말이 없었다. 한일간의 경제격차만큼 인식격차도 컸다. 최우석<본사 편집부국장겸 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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