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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난 배 36시간 지키다 … 62세 선장, 마지막에 내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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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그리스에서 이탈리아로 향하던 중 아드리아해에서 화재가 발생해 좌초된 이탈리아 카페리 ‘노르만 애틀랜틱호’의 한 탑승객이 29일(현지시간) 구조대원들의 부축을 받으며 이탈리아 남부 바리항으로 내려오고 있다. 페리 탑승객들은 마침 인근을 지나던 싱가포르 국적 화물선으로 옮겨 탈 수 있었다. [AP=뉴시스]
자코마치 선장

30일 한 이탈리아 일간지에는 이런 기사 제목이 달렸다. “자코마치가 ‘해양국가 이탈리아’를 구했다.” 자코마치는 그리스 서부의 파트라스항에서 이탈리아 안코나항으로 향하다 화재로 조난당한 이탈리아 여객선 ‘노르만 애틀랜틱’ 호의 선장 아르길리오 자코마치(62) 선장을 가리킨다. 그는 조난당한 배를 마지막까지 지켰다.

 그가 조난신호를 보낸 건 28일 오전이었다. 차량 탑재 칸에서 화재가 난 직후였다. 불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곧 선실도 삼켰다. 신발 밑창이 녹을 정도로 배가 달아올랐다. 정상 작동한 구명정은 서너 척에 불과했다. 한 승객이 “구명정이 꿈쩍 안 했다. 그러다 하나가 떨어지긴 했는데 주변에 있던 10명이 바다에 빠졌다”고 회고했다. 시속 74㎞의 강풍이 부는 차가운 겨울 바다였다. “자칫 대형 참사”(마테오 렌치 이탈리아 총리)로 이어질 수 있었다. 배 안은 혼란에 빠졌다.

이탈리아 해군 헬기가 지난 29일 연기가 솟아오르는 배에서 탑승객들을 구조하고 있다. [AP=뉴시스]

 이탈리아·그리스는 물론 알바니아 구조대까지 나섰다. 악천후에도 구조 작업을 이어갔다. 구조 작업은 밤중에도 이어졌다. 자코마치 선장은 배를 지켰고 구조 활동을 도왔다. 그가 조난신호를 보낸 지 36시간 만에 배 안에 있는 이들이 모두 구출됐다. 그는 선박에 남은 탑승자가 없음을 최종 확인했다. 해군 네 명과 카페리를 예인선에 묶는 작업을 마친 뒤에야 배에서 내렸다.

 그 사이 427명이 구조됐다. 10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 그러나 탑승 명단에 478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단순 계산으로도 41명의 생사가 불분명한 셈이다. 더욱이 구조된 사람 중엔 명단에 없던 이도 있었다. 마우리치오 루피 이탈리아 교통장관이 “탑승자 명단이 애초 468명으로 보고됐다가 478명으로 늘어났고, 구조된 사람 중 탑승자 명단에 없는 경우도 있다. 이탈리아에 불법으로 입국하려는 사람들 다수가 사고 선박에 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망자가 더 늘어날 수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탈리아에선 안도하는 기류가 있다. 구조대원과 자코마치 선장의 헌신 덕분이다. 영국 언론은 자코마치 선장을 “영웅”(가디언)이라고 표현했다. 세월호의 이준석 선장처럼 2012년 이탈리아 연안에서 침몰한 코스타 콩코르디아호의 프란체스코 셰티노 선장이 가장 먼저 배를 버렸다는 아픈 기억 때문이다. 당시 배를 버리고 도망간 셰티노 선장은 현재 살인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자코마치 선장을 위해 마련된 페이스북 계정에는 “끝까지 맡은 바를 했다. 이탈리아엔 당신 같은 사람이 더 많다. 마침내 자부심을 가질 수 있게 됐다”는 댓글이 달렸다. 자코마치 선장은 배에서 내리면서 “이제 모든 게 끝났다. 곧 집으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선장의 헌신과는 대조적으로 승무원들은 우왕좌왕했다. 단잠에 빠진 승객들을 깨운 것은 비상 경보음이나 승무원들의 노크가 아니라 짙은 연기였다. 그때까지 승무원들은 대피 명령을 내리지 않았으며 다른 승객들이 자신들의 방문을 두드리거나 객실 안을 채운 연기로 숨쉬기 어려워 객실을 탈출했다는 게 승객들의 전언이다. 승객들은 헬기 등으로 구조되는 데도 소동을 겪었다. 트럭 운전사인 그리스인 크리스토스 페를리스는 AP통신에 “아이들이 가장 먼저고 그 다음이 여성, 마지막에 남자들이 대피해야 하지만 남자들이 먼저 타려고 아우성이었다”며 “정글의 법칙이 지배했다”고 말했다.

 ◆불법 이민자 선박서 구조 요청=30일 그리스 코르푸섬 근해에서 400~600명으로 추정되는 불법 이민자 중 일부가 무장한 채 몰도바 선적의 화물선 블루스카이M호를 강탈해 구조 요청이 들어왔다고 로이터통신이 그리스 관리들을 인용해 보도했다. 그리스 구축함과 해군 헬기가 현장으로 급파됐다.

런던=고정애 특파원

이탈리아 향하던 여객선 선장
배에 사람 없는 것 확인 후 하선
2년 전 콩코르디아호 때와 달라
언론 "해양국 이탈리아 구해" 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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