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반유행의 도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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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파리가 세계의 모드계를 이끄는 유행의 도시라는 것은 누구나 알고있는 일이다.
그러나 또한 파리가 반유행의 도시라는 사실을 알고있는 이는 드물 것 같다.
유행의 도시 파리에서 살고있는 시민들의 옷차림새에선 1년 내내 유행의 냄새를 도무지 맡을 수 없다. 한겨울에 T셔츠 바람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청년이 있는가하면 오뉴월에 두터운 털코트를 걸치고 나서는 부인들도 있다.
여름이라도 자신이 춥다고 생각하면 겨울옷을. 겨울에도 스스로 덥다고 여기면 여름옷을 꺼내 입는다. 다른 사람의 이런 옷차림을 이상하게 생각한다든가 별스럽게 쳐다보는 이도 물론 없다.
그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또 각자가 언제나 그럴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4계의 기온변화가 한국처럼 두드러지진 않더라도 봄·여름·가을·겨울이 분명히 구분되고 있는데도 그렇다. 그만큼 자유롭게들 옷을 입는다.
세계적으로 이름난 파리의 이른바 「오트 쿠튀르」(고급 의상점)들은 춘하추동의 새로운 모드를 계속해서 내놓아 세계의 유행을 창조하고있으나 일반 시민과는 대부분 무관한 일이다. 오트 쿠튀르들의 값비싼 옷을 사 입는 것은 일부 부유층이나 외국관광객들 뿐이다.
유명배우나 탤런트, 인기가수, 텔리비전의 아나운서나 사회자들도 이들의 옷을 입고있지만 직접 사 입는 일은 없다. 고급 의상점들은 자가제품의 선전을 위해 이들에게 계속해서 새옷을 무상 공급하고있다.
그러나 어쨌거나 일반시민들과는 관계없는 일이다. 유행을 의미한다고 해서 파리시민들이 멋을 모른다는 얘기는 아니다. 파리사람들만큼 멋쟁이도 세상엔 흔치않다. 파리시내를 온종일 헤매도 같은 옷차림을 두 번 만날 수는 없다. 모두가 다른 옷차림이다.
시민들이 즐겨 입는 옷은 대부분 싸구려 들이지만 모두 자신의 개성에 맞게 잘들 골라 입는다. 값비싼 유명 메이커의 옷 한 벌을 사 입기보다는 그 돈으로 값싼 여러 벌의 옷을 장만해 때맞춰 번갈아 입어가며 멋을 낸다.
장바구니를 든 부인네들도 언제나 최선의 멋을 부린다. 단 몇 분 집문 밖을 나서더라도 흐트러진 옷 매무시를 보이지 않는다.
어느 순간이고 자신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복장이다.
그만큼 치장에 소홀함이 없다. 신사나 숙녀나 젊은이나 노인이나 모두가 그렇다.
수년 전에 입었던 헌 옷도 새로 물들이고 손질해 다른 모양으로 입어낼 줄 아는 멋의 천재들이다. 유행이 곧 멋은 아니라는 것을 파리시민들이 가장 잘 터득하고 있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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