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고향 일깨운 조카의 명절이야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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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때늦은 강추위가 잃어버린 고향을 생각나게 했다. 『대동강물이 녹는다는 우수를 무색하게 하는-』하며 고운 목소리가 FM방송음악의 막간을 조용히 흘러나오던 날 정오쯤 고향 조카가 만두속을 만들어 오겠다고 전화를 했다. 이래 저래 미루어 오던 약속이라 그녀는 그날도『오늘은 틀림없이 집에 계시갔지요』하고 묻고 있었다. 『나가지는 않겠지만 하필 이렇게 추운 날, 뭘-』하고 이쪽에서 떨더름하게 말을 받자 그녀의 목소리가 팽팽하게 피치를 올렸다. 『아니, 정주는 영하 20도가 보통인데 이까짓 추위를 뭘 그래요. 고모는 가만 계시라우요. 내가 빚을께요. 갸네들 슬컨좀 멕이구파서 그래요.』 그런투로 나는 고향 조카로 통하는 질녀 앞에서 곧잘 고향을 모르는 뜨내기로 겉돌게 된다. 그날, 그렇게 해서 춘천의 기온이 영하 17도로 보도되던 날 둘이 오랜만에 마주 앉아 만두를 빚을 때 나는 조심스럽게 귀를 세우는 쪽이었고 그녀는 줄 곧 활발한 고향땅 정주의 대변자로 일관했다.
양은 밥통에 꼭꼭 눌러 담은 만두속은 보기보다 많아 다 마치는데 시간이 꽤걸렸다. 그래서 또 이야기는 넉넉한 만두속 만큼이나 넉넉하고 푸짐했다.
달래강 둑에서 캔 달래를 강물에 담궈 바구니에 건져놓고 물이 빠지는 동안 쌀을 씻곤 하는데 거기 달래는 엄돋이(모래땅에 뿌리가 깊이 내리는 것)라 알이 굵고 연해서 더 맛난다고 한다.
강물이 녹을 때 어름장에 굳어있는 게를 잡아다가 게장을 담그면 그것도 여기 것보다 연해서 맛이 비교할바가 아니라고 한다.
신기할 이만큼 생소한 이야기들이 그날 따라 바짝 신나던 것은 지난가을에 부쩍 는 흰머리 탓일까. 나도 이제 내 뿌리를 캘 나이가 됐다는 것일까. 때가 때이니만큼 대보름날이야기가 가장 흥겨웠다.
원래 다섯 명절(정월 초하루, 정월 대보름, 한식 청명, 오월 단오, 팔월 추석)중에서 대보름만이 사람을 위한 명절이라는 것이다.
나머지 명절은 조상에게 차례를 지내는 일이 앞서기 때문에 조상 명절이라니 과연 그럴듯한 이론이다.
열 나흘 밤이 되면 남자는 북을 훔치러 나가고 여자는 잣불을 켜고 원을 비는데 바늘에 잣응 꿰어 불을 붙인다. 그리고 마마각시와 손님각시를 만들어 담장에 앉는 것은 마마에 걸려 얼굴이 얽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다. 남자들이 부잣집에서 나무를 훔쳐 오거나 외양간에서 거름을 거둬 오는게 복을 훔쳐 오는 것으로 풀이된다니 재미있다.
여자는 이와는 달리 보름날 첫 새벽에 동이를 들고 세군데 물을 길러간다. 복을 뜬다고도 하고 용의 알을 뜬다고도 한다니 남보다 앞서가야 할게 정한 이치다. 그렇다면 밤새 아삼놀이(토시통을 세우고 까만 콩 네 개에 금을 낸 걸 그 속에 굴린 다음 토시통을 치우고 눈금으로 끝수를 셈하는 놀이)를 하거나 물장구를 치며 떠들썩하게 놀아잦힌다니 명절은 결국 뜬눈으로 맞을 밖에.
물장구란 놋수저와 물을 담은 놋버치(양푼)에 바가지를 엎어놓고 기장비의 빗자루대와 나무때기로 장단 맞추어 치면 물소리·쇠붙이소리·바가지소리가 한데 어울려서 희한한 조화를 이룬다는 설명이 듣기에 이만저만 신나는게 아니다.
명절 아침상에 맑은 장국과 두부찌개를 곁들여 마시는 술은 귀가 밝으라는「귀밝기」, 밤을 까서 먹지 않고 버리는 일은 이가 튼튼하다는「이밝기」.
그러나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명절 다음 날 일하기를 겨룬다는 일대행사다. 일찍부터 남자는 산에 나무를 하러가거나 집에서 새끼를 꼬는데 누가 많이 하느냐가 문제가 된다. 최고목표는 나무는 아홉짐, 새끼는 아홉등거리라고 한다. 여자는 아래 웃방을 터놓고 여럿이 모여 물래질을 하는데 아홉토깡이가 목표인데 역시 많이 하기 내기다.
또 하나 아홉꾸리를 한다는, 아무리 설명을 들어도 옮길 수가 없다. 본 일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
이번 대보름날엔 아마 이런것들이 한번쯤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갈거다. 고향을 잃어버린게 아니라 고향을 가져본 일이 없다는 삭막한 사실과 더불어.
◇약력▲1931년생▲이대영문과졸업▲한양대 대학원 영문과졸업▲영 워리대학, 에딘버러대학에서 수학▲66년 현대문학에서 시추천완료▲81년 시문학상수상▲현 한양대 영문과교수▲시집『어느날』『집념이후』『거리에서 가설까지』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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