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 없는 편지… 애절한 사연|서울 법대에 하루 60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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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대학가에 가짜대학생 헌팅 작전이 한참이다.
각 대학들의 가짜 색출소동은 최근 서울대법대에서 3년간을 버젓이 수강하고 졸업앨범을 찍기 직전 들통이 난「가짜 서울대법대생 김찬경씨」 해프닝이 몰고온 여파.
서울대의 경우 행정실에서 어림 잡고 있는 가짜 서울대생은 1백여명. 주로 법대·경영대등 세칭 인기학과에 잠입(?)해 있는 이들 가짜 대학생들은 똑같은 서울대 배지를 달고 책가방을 든 훌륭한 변신술로 언제나 행정실 직원들과 숨바꼭질을 하고 있다.
서울대법대 행정실에 매일같이 쌓이는 60여통의 주인 없는 편지는 바로 이들가짜 대학생들 앞으로 온 웃지 못할 사연들이다.
『세상에는 한없이 기다려도 만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기에 시와 노래는 이별로 넘치는 걸까요』라는 수신인이 법대1년 진혁화, 발신인이「N양」으로만 밝힌 예쁜 글씨의 애정 담긴 편지에서부터 빚 독촉을 하는 내용의 편지도 수두룩하다. 김모양(24·서울 세종로)이 서울대 법대4년 ○○○앞으로 보낸 편지에는 『당신 때문에 서울대 이미지를 버리게 되는데 당신의 말씀이 진실이었다면 학교명예를 위해 하루빨리 돈을 들며주세요』라고 적고 마지막 귀절에는 그래도 잊지 않고 기다리겠다는 구애의 내용도 담겨있다. 또 장모씨(서울 쌍문2동)는 서울대 법대생을 사칭한 여자 앞으로 재회를 애타게 갈망하는 사연을 적어보내 학교직원들이 한바탕 웃기도 했다.

<순수 학구파도>
지난 수십 년간 이들 가짜대학생들과 실랑이를 해온 행정실의 한 직원은 『하루에 걸려오는 전화중 10여건은 가짜대학생들을 찾는 것』이라며 그 나름대로 가짜대학생들의 유형을「순수파」「얌체파」「사기파」등 셋으로 분류했다.
「순수파」는 향학열은 높지만 실력이 모자라 이 대학에 낙방했거나 집안사정으로 진학하지 못하고 대학에 나와 강의를 도청하는 부류. 남에게 피해를 안주는게 특징. 중졸 출신의 가짜 법대생 김찬경씨도 처음엔 이 순수파에 속해 강의에 충실하고 서클대표와 검정고시 동기회장직까지 맏아 학생활동에 적극적이었다. 비록 점수 (평균 26점)는 낮았지만 사법시험 1차 시험에도 응시했었다.
그러나 마침내는 가정교사를 했던 집을 담보로 7백만원의 은행융자를 받아냈고, 장래가 촉망되는 법학도를 가장해 지난해 1월 S병원 간호원에게 교수주례로 장가까지 들었다가 졸업앨범 작성때 학번과 사진대조과정에서 들통났다.
김씨는 정읍에 있는 신부집에 함을 보낼때는 법대복학생 모임인 녹우회 회원에게 함을 지워 보내기도 했다.
이번 졸업반앨범 촬영때는 김씨 외에도 조문용이란 학생이 또한명 가짜로 드러났다.

<그룹도 만들어>
김모양(22·회사원)은 81년 1월 서울 종로6가 버스정류장에서 서울대 배지를 달고 길에 쓰러져 있는 청년을 발견했다.
이 청년을 도와준 것이 인연이 되어 며칠뒤 모든 것을 허락하고 40만원을 빌려주었다가 가짜 법대생이 자취를 감추는 바람에 신세를 망쳤다.
또 지년 7월에는 신모양(23·회사원)이 친척의 소개로 3개월 전부터 사귀어 오던 자칭 서울대 법대생 한모씨(25)를 수상히 여겨 학교에 연락, 가짜임을 밝혀내고 법대 행정실 직원이 신양과 만나는 자리에서 한씨를 붙잡아 경찰에 넘기기도 했다.
이들 가짜대학생들은 때로는 자기들끼리 그룹을 만들어 집단적으로 사기행각을 벌이기도 한다.
서울대 법대의 한봉희군(24)를 사칭하고 다니던 한 청년은 고대생, 서울대 행정대학원생 등으로 위장한 3명의 가짜동료들과 함께 80년 가을부터 영등포시장, 종로2가 일대를 누비다가 지난 3월 오모양(23·회사원)과 결혼해 오양의 친정으로부터 3백만원의 돈을 가져다 서울 대방동에서 살림을 차렸다가 뒤늦게 가짜임이 밝혀지자 어디론가 도망쳐 버렸다는 것.
가짜 한씨가 사라진뒤 진짜학생 한군은 학생증을 분실한 죄 하나로 7∼8명의 피해자들에게 시달리는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지난 82년 가을에는 한국전력 모지점의 지점장인 K씨의 둘째아들의 가정교사를 하던 가짜 서울대 법대생 김영석씨는 『학교에서 내가 과외교사 노릇하고 있는 사실이 들통났으니 입막음을 해야겠다』면서 K씨에게 5백만원을 요구하다 공갈협의로 경찰에 구속되기도 했다.
이들 가짜대학생들에게 피해를 본 것은 주로 직장에 다니는 미혼여성이거나 여대생들. 피해여성들은 「미래의 낭군」을 만나려고 몸치장을 하고 대학캠퍼스에 나왔다가 눈물을 흘리며 낭패하고 돌아가기 일쑤.

<학생증 훔쳐내>
가짜학생들은 『학원사태에 가담하여 군에 갔다 왔다』『학도호국단의 간부다』『집안형편이 어렵지만 공부를 잘해서 교수들의 총애를 받고 장학금도 받는다』는 등의 말로 주위사람들을 현혹시킨다는 것.
가짜대학생은 서울대 외에도 고대·연대·이대 등에도 많다. 고대에서 적발된 신현동군 (20)은 지난해 9월 고대강의실에서 주은 법대 2년생의 학생증에 자기사진을 붙여 가짜 고대생 행세를 해왔다.
신군은 고대도서관을 드나들면서 학생들의 책과 카세트·시계 등을 훔쳤고 모대학 여대생(21)에게 고대 학생증을 만들어주고 도서관에 함께 출입해「캠퍼스 커풀」로 통하기도 했다.
지난해 김모씨(29)는 이대불문과 학생이라는 이모양(23)과 2개월 동안 동거를 하다 자신이 김을 비운사이 이양이 현금과 패물등 30만원 어치의 금품을 훔쳐 도망가는 바람에 학교에 찾아가 확인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또 최모양(22)은 지난해 9월 이대에서 학생증과 배지를 훔쳐 영문과 3학년으로 행세하면서 대학생 하계봉사활동의 일원으로 일하는등 감쪽 같이 진짜대학생 노릇을 연출해오다 학교 측에 적발됐다.
이대 측은 이들 가짜학생들이 유흥업소 등에 취직, 학교의 이미지를 흐리게 하는등 많은 피해를 주고있다고 울상.
고대당국자는 여름방학이 끝나면 바닷가에서 만난 여자들로부터 편지가 쇄도, 구내 우체국 수신함에는 주인 없는 편지가 쌓이며 학교앞 술집에는 가짜학생들이 술을 마시고 학생증을 맡긴뒤 달아나는 일이 잦아 「학생증 담보외상」의 인정이 사라졌다고 쓴웃음.
법대행정실의 한 직원은 『서울대법인에 원서를 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것으로 여기는 사회풍토가 문제』라면서 『졸업식 때만 되면 꽃다발을 들고 가짜학생을 찾아오는 수많은 여성들을 보면 안타까울 뿐』이라고 했다.
한편 서울대 측은 『가짜학생들이 진짜학생들보다 학사일정이나 행정업무 등에 관해 더 자세히 알고 있는등 사전준비(?)가 철저하기 때문에 가짜를 가려내기가 무척 어렵고 또 애써 잡아낸다 하더라도 피해자가 나타나지 않는 한 처벌할 수 있는 법적 근거가 없지 않느냐』면서 가짜학생처리에 난색용 표명하고 있다.
서울대법대 행정실 직원들은 3월의 결혼철이 되면 문의 전화가 쏟아져 들어올 것이라면서 벌써부터 걱정스러운 모습들이었다. <김재기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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