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김영희 칼럼

맥아더 동상은 후손들의 자산이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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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김영희
김영희 기자 중앙일보 고문

초가을 날씨는 화창했다. 녹음이 우거지고 붉은 장미와 보라색 국화와 인디언 핑크색 피튜니아가 활짝 웃고 있었다. 시가지 너머 연안부두는 정오의 휴식에 들었는지 한가롭기만 하고 그날 포연(砲煙)으로 뒤덮였을 월미도 하늘에는 하얀 솜털구름이 흐르고 있었다. 인천상륙작전 55주년 하루 전의 인천 자유공원 맥아더 동상 주변에는 아늑한 평화와 관광객들의 웃음이 넘쳤다.

맥아더 장군은 오른손에 쌍안경을 들고 공원 너머로 연안부두와 월미도를 내려다보면서 의연히 서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나를 여기서 끌어내리겠다는 사람들, 참으로 우둔하구먼. 북한 인민군이 남침하여 순식간에 남한땅의 90%를 점령했던 일은 온 세상이 알고, 나의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전세(戰勢)가 뒤집혀 인민군이 북으로 패퇴(敗退)했다는 것은 부동(不動)의 역사인데, 그걸 반미.민족의 열정 하나로 뒤집겠다니 그 만용(蠻勇)이 참으로 가소롭도다.

인천상륙작전이 없었다면 인민군이 낙동강 전선을 돌파하여 부산까지 밀고 내려가 한국이 적화 통일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반미.민족세력은 미국의 참전으로 대한민국이 살아남은 것이 절통한 것인가. 그때 미군과 유엔군이 이 땅의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내지 않았더라면 맥아더를 전쟁광, 점령군의 괴수라고 악을 쓰면서 그의 동상에 돌진하려는 그 사람들, 지금은 어디서 어떤 구호를 외치고 있을까.

반미.민족세력의 사후(事後) 소망이 아니라도 인천상륙작전은 감행되지 않았거나 감행되어도 참담한 실패로 끝날 뻔했다.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이 미군의 인천상륙을 확실히 감을 잡고 김일성에게 대비하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군사장비와 전쟁수행을 소련에 의존하고 있던 김일성은 마오쩌둥의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다. 소련 군사고문들이 미군의 인천상륙은 불가능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미군 합동참모본부도 처음에는 인천상륙에 반대했다. 인천 앞바다의 조수 간만(干滿)의 차이가 크고 썰물 때 수심이 50m 미만이라 상륙용 LST를 띄울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맥아더는 북한 전략가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인천상륙은 승산이 있다고 합참의 별들을 설득했다. 제2차 포에니전쟁(기원전 218~201년)에서 카르타고의 명장 한니발이 혹한 속의 피레네와 알프스의 고산준령(高山峻嶺)을 넘어 로마를 공격해 전사(戰史)에 길이 남을 전승을 거둔 것도 그런 전략이 불가능하다는 로마인들의 통념을 거꾸로 이용한 결과였다.

반미.민족세력이 맥아더에게 절치부심하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어 보인다. 하나는 그가 그해 6월 29일 수원전선을 시찰하고 본국 정부에 미국의 참전을 강력히 건의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중공군 개입 후 원자폭탄을 사용하자고 주장해 한민족을 대량살상할 뻔했다고 보는 것이다. 북한에 편향된 반미.민족세력의 눈에는 맥아더 때문에 '통일', 그것도 적화 통일의 기회가 무산된 것은 보이고 자유민주주의가, 아니 대한민국이 백척간두에서 지켜진 것은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자유민주주의 품 안에서 물질적 풍요와 자유 같은 자유민주주의의 소중한 열매를 즐기는 그들은 최소한의 자위수단을 갖지 못한 우리를 대신해서 그런 자유민주주의를 지켜준 사람을 전쟁광, 노근리 민간인 학살 지시자로 기세 좋게 몰아붙인다. 일부 정치권도 그 장단에 정치춤을 춘다. 경악스럽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

55년 전의 급박했던 상황에서 빠져나와 미국에 할 말 하고 북한에 미소 보내면서 사는 오늘의 시점에 서서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과 맥아더의 전략을 통일 방해행위라고 공격하는 것은 비문화적, 반(反)역사적 역사 비틀기다. 그것은 해수욕장에서 찍은 비키니 차림 여자사진을 서울의 종로통에서 높이 쳐들고 그녀는 미풍양속을 해치는 여자라고 문제 삼는 것과 흡사하다. 정복자 알렉산더와 칭기즈칸과 나폴레옹의 말발굽에 유린된 그 많은 나라의 어디서 그런 역사 지우기가 행해지는가. 맥아더 동상 같은 역사적인 기념물은 우리가 후손들에게 넘겨줄 책임이 있는 역사적인 자산이다.

김영희 국제문제 대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