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33) 제79화 육사졸업생들(86) 6기생의 사회활동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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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육사의 다른 기들과 마찬가지로 6기생들도 다수가 5.16을 계기로 사회 각계에 진출했다.
관계로는 박경원 박현식 박태원 김시진장군과 동홍욱·정규석·고영보대령등이 진출했다.박태원장군은 나중 국회의원도 지냈다.
실업계에는 박태준장군이 포철제철을 창설때부터 맡아 「세계의 철강인」으로 부각됐고 최석신소장은 외교관으로 전신,현재까지 외교일선에서 활약하고 있다.
6기생중 선두주자였던 박경원장군 혁명직후 군경에서 경북지사로 기용됐다가 예편,강원지사로 옮겼다.
박장군은 6.25전 보병학교 전술 교관으로 있으면서 5기의 이용장군과 함께 국군의 공격 방어전술을 개발,정착시킨 공로가 있었다. 이장군이 공격전술을 ,박장군이 방어전술을 맡았다.
휴전전 박장군은 18연대장으로 화천근방에서 싸웠는데 화천북방의 689고지를 놓고 중공 북괴군과 뺏고 뺏기는 진지전을 거듭했다.낮에 고지를 점령했다가도 밤이면 적의 인해전술에 밀려 다시 뺏기기를 거듭하던 끝에 박장군은 『국군의 방어전술을 개발한 내가 이 고지를 뺏긴다면 국군엔 전술이 없는 것이나 같다』 는 책임감에서 마지막엔 연대장인 자신이 직접 나서 끝내 고지를 완전 점령했다고 한다.
그때 격전에서 산화한 젊은 부하들의 기억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으로 경북지사 시절에는 관용차의 번호를 689번으로 달고 다녔다고 한다.
강원지사때는 저수지 댐등 내수면개발에 착안, 미국산 송어를 처음 도입해 보급시키기도 했다.강원지사에서 물러난 뒤 영해화학사장직을 맡아 일하다 퇴임했으며 민간외교단체인 PTP(People to People)를 창설, 20여년간 이끈 공로로 아이젠하워평화상을 받기도 했다.
박현식장군은 역시 군정에서 서울시 교육감으로 발탁됐다. 청렴· 결백한 일처리로 지금도 교육계 인사들로부터 존경을 받는다고 들었다.강직한 인품은 박대통령에게서 신임을 얻어 군에 복귀해서도 청와대 사정담당 보좌관 군파견관을 맡았었고,백마사단장 국방대학원장을 거쳐 예편하면서 치안본부장으로 발탁됐다.박장군은 국장급의 치안국을 차관급의 치안본부로 끌어올린 장본인이다.
그러나 동기생들은 중장으로 예편한 그를 차관급의 치안본부장으로 임명한데 대해 대부분 불만이었다고 한다. 6기생중 대장이 없는 것도 이처럼「대장감들이 민간부문에 차출당한 때문이라는 설명이다.
박장군은 치안본부장으로 가자 그때까지 명목만 있고 일선까지 전달이 안되기 일쑤였던 각종 경찰업무지원예산을 전액 일선에 내려보내 쓰게 하는등 예산 후생제도를 획기적으로 개선했다. 지금도 경찰의 공로자로 평가를 받는다고 들었다.
김시진장군은 헌병감으로 예편 후 67년 청와대 경호실 차장으로 들어갔다가 민정 정보수석 비서관을 역임했다.박대통령이 5사단 참모장때 헌병참모로 함께 일한 인연이 있어 박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웠다고 들었다.
박태원장군은 군정때 치안국장을 지냈고 경기지사를 역임한뒤 국회에 진출,공화당 부총무로도 활약했다.
박태준장군은 포항제철을 무에서 창설해 오늘날까지 키워온 우리나라 철강산업의 제1공로자다.동기생들은 세계에서 유례없이 단기간에 건설되고,가장 싼값에 쇠를 생산하는 포철의 배경에는 박대통령의 남다른 신임과 박장군의 강철같은 의지가 있었다고 말한다. 일체의 경제 외적인 압력이나 고려를 배제하고 건설, 경영할 수 있었기 때문에 방만 안일끝에 부실화하는 국영기업의 예를 깨고 어느 사기업보다 능률적이고 생산성이 높은 공장이 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철강이 국가 기간산업이라는 점에서 동기생들은 이점 국가의 행운이라고까지 말한다. 「철에 미친 사나이」로 자처하며 한눈 팔지않고 포철만을 지켜 왔던 박장군은 제5공화국 들어 처음 국회에 진출했다. 재무위원장을 맡고 있다.
정규석대령은 예편후 체신부 공무원으로 들어가 차관까지 승진한 능력가. 현재는 체신공제조합 이사장으로 있다.
고영보대령은 6기생중 유일하게 공군으로 간 케이스.일제때 소년비행학교를 나온 경력 때문에 6·25전 공군이 확장될 때 중위로 공군에 가서 대령까지 진급했다.6·25때는 비행기를 끌고 원산폭격에 출격했다가 적기에 맞아 동체에 구명이 뚫린 비행기로 비상착륙,구사일생으로 살아나기도 했다. 5.16후 군정에서 혁명재판소장을 거쳐 공보무차관을 역임했다.
동홍욱대령도 예편후 감사원사무총장 대전 공무원교육원장직을 맡았었다.
6기생중 유일하게 외교관이 된 최석신소장은 주파나마대사를 거쳐 현재 노르웨이대사. 홍수환선수가「카라스키야」를 4전5기로 때려 누인 신화를 창조할 때 파나마대사로 현장에서 지원했다.
작고한 유근국장군은 국방부 예비군국장으로 예비군법을 만든 주역.예편후 통일주체국민회의 사무총장으로 일하다 병사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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