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진주 검무 인간문화재 이윤례 할머니(80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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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어렵거나 슬픈 일이 없었느냐구? 내일생을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통곡할 정도로 온통 외롭고 어렵고 슬픈일의 연속이었지….』
인간문화재 이윤례할머니(80·경남진주시상봉동동857의9·중요무형문화재12호 진주검무기능보유자)는 한마디로 자기는 슬픈일생을 살아왔다고 했다.
진주관아의 관노였던 아버지는 기생을 관리하는 직책을 맡고 있었다. 어머니의 외딸이었던 그는 다행히 진주보통학교(3년제)를 졸업했다. 졸업후 가계를 돕기위해 직조 전습소에 6개월 다녔으나 어머니가 그를 권번(가무를 가르쳐 기생을 양성하던 곳)의 전신인 예기조합에 보내고 말았다.
그래서 어쩌다 하루가고 이틀가고 여러해 몇십년이 가고 말았다는 것이 이할머니의 말. 그 숱한 세월속에서 단 한번도 태어난 것이 즐겁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고 했다.
예기조합에서 그는 가야금·거문고 다루는 법과 창, 그리고 춤을 배웠다.
특히 검무는 진주기생들의 장기였으므로 가장 열심히 익힌 기예가운데 하나였다.

<기예겨룰 때 1등>
조선조에서도 진주검무는 무용에서 으뜸으로 쳤던 것. 8도의 명기들이 한양에 모여 기예를 겨룰때면 꼭 진주검무가 1등을 했다고 이할머니는 자랑한다.
특히 진주의 검무는 논개의 기상이 서려 있어 더욱 그뜻이 높다. 논개의 제삿날(음력6월29일)이나 진주의 뜻깊은 행사가 있는 날에는 지금도 검무가 행사를 장식한다.
염불-타령-도돌이-잦은굿거리-도돌이로 박자와 호흡이 점점 빨라져 가는 진주의 검무는 옛날엔 기생이 아니더라도 진주사람이 함께 출 수 있는 춤이기도 했다.
촉석루에 가면 검무를 잘 추는 기생들이 약간의 돈을 받고 검무를 가르쳐 주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검무가 평생동안 이할머니의 슬픔을 삭여주고 끝없이 위로해 주었던 것이라고.
학교다닐 때 예기조합이 좋지않은 곳이란 인식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때부터 친구들을 만나면 부끄러워 피해 다녔다고 한다. 『기생이란 가무를 팔아먹고 사는 직업인데, 지금 생각하면 과히 나쁘지 않은 것이지. 그런데도 옛날엔 모두 왜그리 나쁘게 생각했던지….』기생을 천시했던 당시 사람들의 의식이 이할머니의 일생을 슬프게 만든 원인이 되고 말았다고 했다. 아무도 그를 환영하는 사람이 없었고, 혼자 사는 것을 도와준 사람도 없었다.
『결혼? 기생이 무슨 결혼이 있는가. 그러나 딸하나 아들하나는 얻었지. 허허….』
딸하나 아들하나를 키우기 위해 그는 6년동안 권번과 인연을 끊었다. 그러다 아들이 4살에 경기를 일으켜 죽고나자 6년만에 다시 권번으로 들어갔다.
생일이나 환갑등 잔치모임에 불려다니며 가무를 팔아서 모은 돈을 6년동안 모두 써버렸기 때문에 다시 권번으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
기생이란 것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딸을 권번에 넣지는 않았다. 대신 국민학교를 마치고 결혼을 시켰다. 하지만 사위가 기생장모라 그런지 자기를 좋아하는 것 같지 않았다고.
사위하고는 말한마디 제대로 해본적이 없으며 자식이라고 찾아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이할머니는 딸이 출가한 40세때부터 지금까지 혼자 살고 있다고 했다.
딸의 나이 지금 60세. 증손자녀까지 두고있는 이할머니지만 가정이란 따뜻한 분위기를 한번도 맛본적이 없다.

<끝나면 언제나 눈물>
기생이란 직업 때문에 일가친척은 물론 이웃에서까지도 소외당하고 살았다.
해방이후 권번이 없어지고는 더욱 살기가 어려워졌다.
이곳저곳 불려다니며 창가도 부르고 춤도 췄지만 놀이판이 끝나고 나면 눈물만 났다는 것이다.
6·25사변때 부산으로 피난갔다 돌아오니 집이 불타버려 3간짜리 오두막집 한채를 사서 겨우 기거하게 되었다.
방한칸을 세두었는데, 세든 사람이 기생주인이라고 늘 행패를 부리고 집을 부수는 바람에이 집마저 팔아버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세든 사람에게 얻어 맞은 것이 아직도 가끔 아픔으로 되살아난다는 것.
이런 가운데서도 이할머니에게 검무를 계속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사변후 진주에 국악원이 생기면서 그를 검무선생으로 초빙한 것이다. 물론 수입은 만족한 것이 못되어 그는 논개사당을 지키는 사당지기를 자청해서 맡았다. 불기없는 모의당에서의 생활은 오직 논개부인에게 기도드리는 것으로 보냈다고 한다.
『인간문화재가 나를 살린 셈이지. 그렇지 않으면 지금 누구에게 의탁하고 있겠어.』
조선조의 검무가 그대로 전해지고 있는 사실이 국악인 김천흥씨에 의해 밝혀졌고 이를 인연으로 진주의 검무는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옛 검무는 4명이 함께 추는 4검무로 거의 1시간이 걸리는 길고 긴 춤이었다. 이 4검무의 반복부분을 없애고 8명이 추는 20분짜리 8검무를 만들어 이를 무형문화재로 만들었다. 그의권번 동료들과 후배들 8명이 67년 모두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이할머니 일생에 있어서 단 한번의 보람이었고 즐거움이었다.

<이젠 춤출수도 없어>
함께 인간문화재가 되었던 김자진씨(작고)는 이할머니의 예기조합한해 후배로 평생을 짝이 되어 춤춰왔던 가장 친한 친구.
아들과 함께 살수 있었던 김씨는 재작년 숨을 거두며 친구인 자기걱정을 많이도 했다고 한다.
친구를 잃은 이할머니는 재작년부터 전수회관에 나와 장단이나 쳐주지 직접 춤을 추지는 못한다고 전수자 정필순씨(준인간문화재)는 말해준다. 그러나 이할머니의 장단이 아직도 가장 안정된 것이어서 춤과 호흡이 맞는다는 것.
2평반도 못되는 1백만원짜리 전세방에서 혼자 여생을 보내고 있는 이할머니는 그나마 의암(논개의 호칭)의 덕이라고 감사해하고 있다.

<김징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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