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폭동진압종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박진경대령 암살사건의 진상과 배후가 밝혀졌을 때도 군내에 잠복해 있던 공산주의자 오일균소령의 정체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불안을 느꼈던지 포로수용소장을 자청하여 대대장직을 떠났다. 생포자·귀순자· 하산자들의 성분을 조사 분류하여 양민은 석방하고 좌익분자는 계몽 전향시키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그러나 오일균은 반대로 공산분자들을 석방하고 양민은 계속 억류하고 있었다. 이런 사질은 양민들의 제보로 들통이 났다.
드디어 오일균은 검거되어 정체가 밝혀졌고 그가 군내에서 포섭 조직한 좌익분포의 전모가 드러나 김창룡의 숙군작업이 시각된 것이다.
그 사이에 5·10선거를 거쳐 이승만박사를 대통령으로 하는 민주독립국가 대한민국이 탄생하고 경비대는 국군이 됐다.
정부는 48년 10월11일 제5, 6, 9, 14연대에서 1개 대대씩 차출하고 해군과 경찰 일부를 배속시켜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했다. 사령관은 제5여단장 김상겸대령(3특) 이었다.
당시 9연대는 11연대에서 분리되어 다시 편성됐는데 연대장(4대)은 11연대 부연대장 송요찬소령이 맡았다.
한편 여수의 14연대에서 차출된 제1대대 (대대장 김일영대위 2기생)가 제주도로 출발하려던 날 밤 연대안의 좌익세력이 제주도 출동을 반대하면서 폭동을 일으켰다. 이것이 이른바 여순반란이다.
14연대는 김상겸대령의 5여단에 속해 있었는데 김대령은 반란의 문책을 당해 해임됨에 따라 제주도 경비사령관직도 맡지 못했다. 당시 65세였다.
원산태생인 그는 만주 하르빈 외국어학교를 거쳐 제정러시아의 할곰육사를 졸업했고 1차대전 때는 전공을 세워 중위에서 대위로 특진되기도 했다.
중좌까지 올라갔다가「레닌」의 10월 혁명 후 해임되어 1924년에 폴란드군의 대좌가 됐다. 그러나 2차대전이 발발하고 폴란드가 독·소에 분할 점령되자 귀국하여 시흥에서 농장을 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체코·유고·터키·소련·폴란드·일본어 등 수개 외국어에 능통하고 군사경력도 다채로 왔지만 연령때문인지 국군에서의 활약은 빈약했다. 좀 신비스러운 데가 있던 베일속의 노병이었다.
9연대장 송요찬소령은 어느 날밤 작전계획을 경찰에 통보하려고 수화기를 들었다가 합선되어 들려오는 괴 전화를 듣게 됐다.
연대 안에서 군의 작전계획을 폭도들에게 알려주는 내용이었다. 수색 결과 연대 안의 공산세포 80명이 검거됐는데 그중 장교가 3명이었다.
그 후 9연대는 대전으로 이동하고 함병선중령(군영·중장)이 지휘하는 대전의 제2연대가 9연대와 교대하여 폭동진압을 맡게 됐다.
한편 반도두목 김달삼은 제주도를 탈출하여 48년 8월21일 해주에서 열린「남조선 인민대표회의」에 제주도 인민 대표로서 참석해 특별보고를 했다고 한다.
그의 보고내용은 소련 잠수함으로 탈출했다는 것과 제주 폭도들의 활동상황에 관한 것으로 전해졌다. 김달삼은 이듬해 태백산 공비토벌 때 사살됐다고 한다.
그 후 이덕구의 지휘를 받게 된 폭도들은 제주도청에 불을 지르고, 군의 무기운반차를 기습하여 1백여정의 소총도 탈취해 갔다. 여순사건에 호응하여 공세를 강화한 것이다.
이에 정부는 49년 3월2일 제주도지구전투사령부를 설치하고 육사부교장이던 유재흥대령을 사령관, 2연대장 함병선중령을 참모장겸임으로 발령했다.
그후 무장토벌은 한층 강화되어 귀순자의 제보를 받아 이덕구·김민성 등 반도두목급의 본거지를 기습, 이들을 살해하고 그 목을 서귀포와 제주에 내걸어 도민들에게 공개했다.
이덕구는 부유층 출신으로 학병으로 나갔던 일본군 소위 출신이었다. 곰보얼굴에 성격은 부드러웠다고 한다.
그 후 반도의 주역은 소탕되고 잔당 1백여 명이 9연대에서 탈출, 합류한 고성구와 김성규에게 지도되고 있었지만 큰 활약은 없었다. 49년5월15일 제주도지구 전투사령부가 해체됐다. 5개월간 국군도 1백19명이 전사했다.
잔당들은 한라산에 숨어 있다가 동란중인 52년 여름에 다시 나타나 제주방송국과 서귀포 수력발전소를 습격하여 그 존재를 과시하려 했다.
그러나 박창암소령 (특임· 예비역 준장 혁검부장) 의 특수부대인 「무지개부대」에 의해 5개월만에 완전히 소탕됐다. 무지개부대 병력은 86명이었다.
이로써 48년 4월3일 시작된 제주도 폭동은 약5년 만에 완전히 종식됐다. 그 후의 평화와 번영이 오늘까지 지속되고 있지만 폭동의 상처는 너무나 컸다.
국방부가 발행한 『한국전쟁사(1)』도 『반도들이 쓰러진 시체 위에는 그들의 가족과 친척, 그리고 30만 도민의 희생이 겹치고 있었으니 한국최대의 섬 제주도는 피로 물들고 말았다』고 적고 있다. <계속>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