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가 전장일순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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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미 국방성이 작성한 84∼88회계연도의 국방지침은 미국의 나토권, 페르시아만 유전지대, 그리고 태평양지역 방위전략의 상호 유기적인 관계와 우선 순위를 밝히는 중요한 문서로 우리의 주목을 끈다.
1백36페이지의 이 국방지침의 내용은 82년 6월부터 미국신문에 부분적으로 보도되기 시작하여 지난 19일 우리 입장에서는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이 공개되었다.
소련이 페르시아만 지역의 유전지대에 재래식 무기로 공격을 가할 경우 미국은 북한, 베트남, 그리고 소련의 해안지역을 공격하여 극동지역의 소련군사력이 페르시아만 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방지하겠다는 것이 이번에 밝혀진 국방지침의 글자다.
다시 말하면 중동의 유전지대가 소련의 공격을 받으면 전쟁은 페르시아부과 동남아시아, 그리고 동북아시아에 걸친 전면전으로 확대되는 것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미국이 페르시아만의 석유를 보호하기 위한 전략을 본격적으로 세우기 시작한 것은 이란혁명이 일어나「팔레비」왕조가 무너지고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여 페르시아만의 보수적인 산유국들이 2중으로 위협을 받게 되고서부터이다.
「카터」행정부가 80년에 신속배치군(RDF)을 창설하고,「레이건」행정부가 82년 12월 중동군사령부를 별도로 설치하여 유사시에 23만의 병력을 동원할 수 있는 체제를 갖추고 있는 것도 원유보호의 전략에서 나온 것이다.
문제의「국방지침」의 내용 중에서 작년 6월에 워싱턴포스트지가 보도한 부분을 보면 미국은 미국과 유럽, 페르시아만, 태평양의 순서로 방위의 중요성을 매겨놓고 있다. 한때 아시아 우방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우리가 강력히 반대했던「스윙전략」이라는 것도 이 우선 순위에 따라서 생긴 개념이었다. 유럽의 유사시에는 태평양지역의 군사력을 유럽전선으로 이동시킨다는 것이었다.
태평양의 유사시에 나토주둔군을 아시아로 긴급 배치한다는 구상이 없는 스윙전략이 미국의 전통적인 유럽중심주의의 소산이라는 비판을 받아 사실상 폐지된 것은 다행이다.
미국의 국방지침의 내용 중 그보다 이틀 전에 공개된 부분은 소련이 페르시아만을 공격하면 미국은 중공과 합세하여 소련을 공격한다고 되어있다.
이 지침에 따르면 한국을 포함한 태평양국가들은 경제적으로 중동원유에 의존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군사전략으로도 페르시아만의 석의 안위에 종속되도록 되었다.
유전지대에서 미국과 소련이 군사적으로 충돌하여 분쟁의 규모가 전면전의 성격을 띨 경우 소련의 극동해군은 우리의 동해와 오호츠크해, 그리고 북태평양을 잇는 해상수송로를 제압하고 태평양해로를 장악하는 전략을 세워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사정 하에서 유전지대를 침공한 소련에 대해 북한과 극동의 소련해안에서 보복공격을 가할 경우 아시아대륙에서 미국의 유일한 동맹국이요 미군전투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한국이 소련군 또는 북한-소련동맹군의 공격대상이 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더군다나 미국이 중공과 공동으로 소련을 공격한다는 구상이 현실성 없는 일이고 보면 미국의 국방지침이 밝힌 전략이 한국을 엉뚱한 피해자로 만들 가능성만 높은 것이다.
유전지대에 대한 소련의 공격 대가를 한국이 치러야하는 전략을 수립하면서 한국이 미국과 충분한 협의를 거쳤는지 묻고 싶다. 그것이 만약 미국의 일방적인 구상이라면 우리는 미국울 상대로 지금부터라도 대응책을 서둘러야 한다.
방위전략의 우선 순위에서는 유럽, 중동 다음 자리에 있는 우리가 피해자의 우선 순위에서는 맨 윗자리에 서야하는 전략은 균형과 합리성을 잃은 것이라고 밖에 할 수 없다.
한반도의 안정은 작은 충격에도 깨질 성질의 것이다. 항상 전쟁 재발의 위험을 안고있는 한반도와 페르시아만의 화약고를 도화선으로 연결하는 전략이 우리와 논의 없이 수립되는 것을 우리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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