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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白球와 함께한 60年] (28) 韓·日 슈퍼게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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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프로야구가 출범하면서 서종철 총재와 나는 선수들의 수준을 끌어올리고 국제 경쟁력을 높일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일본 프로야구를 벤치마킹한 결과 경기력을 빨리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은 활발한 국제교류라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보다 수준이 높은 미국.일본과 많은 친선경기를 치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다.

일본은 야구가 도입된 이후 1908년을 시작으로 1934년까지 미국 팀을 8회 초청해서 친선경기를 치렀다. 친선경기에서의 성적은 형편없었다. 미국 아마추어 대표팀을 상대로는 38전 전패, 니그로리그 로열 자이언츠에는 48전 1승1무46패, 메이저리그 선발팀을 상대로는 51전 1승50패였다.

그러나 이처럼 일방적인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야구열기를 부채질하기에는 충분했고, 결국 이 친선경기는 1936년 일본에 프로야구를 탄생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본은 프로야구 출범 이후에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주도로 메이저리그 선발팀을 1회, 단일팀을 무려 18회나 초청해서 경기를 했다. 그리고 86년부터는 정식으로 2년에 한번씩 일본에서 미.일 올스타전을 치르기 시작했다. 일본의 마이니치신문과 주니치 신문이 번갈아가면서 대회를 주최했다.

1983년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쇼리키 구단주는 "향후 한.일 친선경기가 열리게 되면 그 주최권을 꼭 우리에게 달라"고 요청했다. 또 85년에는 비서실장을 통해 86년 2월 미야자키 요미우리 스프링캠프에 서종철 총재와 나를 초청했다. 우리가 방문하자 요미우리 측은 그때에도 한.일 친선경기 주최권을 달라고 요청했다.

당장이라도 한.일 친선경기를 개최할 것 같았던 요미우리 측은 그러나 그 이후에 별다른 움직임이 없었다. 나는 일본을 방문할 때마다 은근히 그 문제를 거론했고 한번은 자이언츠의 와다나베 구단주에게 "벌써 몇년 전에 친선경기를 주최한다더니 왜 아무런 말이 없느냐"고 항의하기도 했다. 또 자이언츠에서 연수했던 박종환 특별보좌역에게 요미우리 측의 의사를 타진해 보기도 했으나 별 반응이 없었다.

그런 가운데 89년 주니치신문이 소유한 동경신문의 사업부장 이토 오사무가 내한했다. 그는 10년 동안 동경신문의 체육부장을 지낸 바 있는 체육기자 출신이었다. 그가 내게 찾아와서 "한.일 프로야구 친선경기를 주니치신문에서 주최하고 싶다"고 요청했다.

나는 선뜻 받아들일 수 없었다. 나는 "한.일 친선경기는 요미우리에서 먼저 주최하겠다고 의사를 밝힌 바 있다. 주니치 쪽에서 요미우리 쇼리키 구단주에게 직접 양해를 구하지 않으면 어렵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토 사업부장은 일본으로 돌아간 뒤 "주니치신문의 가토 오너와 요미우리의 쇼리키 오너가 합의점을 찾아가고 있다"고 전화를 걸어왔다. 결국 주니치의 요청을 요미우리가 받아들여 90년 3월 6일 일본 프로야구 실행위원회는 '91시즌 뒤에 주니치신문에서 개최해도 좋다'는 결정을 내렸다.

90년 11월 30일 주니치 가토 회장과 내가 서울에서 한.일 슈퍼게임 조인식을 했다. 91년 11월 2일부터 10일까지 일본에서 대망의 제1회 한.일 슈퍼게임이 열렸고 대회가 끝난 뒤에는 감독.코치.선수들이 모여 슈퍼게임 평가회의를 열었다. 한.일 슈퍼게임은 99년까지 3회에 걸쳐 열렸고 한국프로야구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이용일 前 한국 야구위원회 사무총장
정리=이태일 야구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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