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민주주의 다시 곱씹어 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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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갈등은 자유민주주의의 존재 조건이다. 그것은 모든 개인과 집단의 다원성을 인정하고 그들이 다양한 이익을 주장하는 것을 보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민주적 정권의 요체는 갈등 해결을 위한 규칙의 설정과 준수에 놓여 있다. 갈등 해결을 위한 규칙이 안정성을 잃고 상황에 따라, 그리고 정략적인 이유로 바뀌게 된다면 민주주의의 정치는 야만적인 폭력으로서의 권력이 횡행하는 전쟁과 같은 정치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상적으로는 모든 갈등이 사라진 평화로운 사회가 도래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이 세상에서의 정치가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유토피아를 꿈꾸고 지향할 때 기억해야 할 중요한 점은 갈등 해결의 규칙이 갈등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갈등을 정해진 틀 안에서 처리할 수 있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과장된 이상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폭력이 자행되고, 폭력적 정치가 행해졌는가는 동서고금의 역사를 일별해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노무현 대통령의 연정과 선거제도 개혁에 대한 주장을 둘러싼 논쟁은 한국의 민주주의가 성숙하는 데 매우 심각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노 대통령이 정치 개혁의 명분으로 내세우는 것은 상생과 공존의 국민통합적 정치와 지역주의 극복이다. 그리고 그것의 이론적 뒷받침으로는 유럽 일부 국가들에서 실행되고 있는 권력분점형의 협의민주주의적 모델을 참조한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에는 다음과 같은 심각한 논리적 결함과 비약이 있다. 무엇보다 먼저, 협의민주주의의 역사적 배경에는 다종교.다언어.다종족 등에 기초한 '구조화된' 균열 구조가 놓여 있으며, 그러한 균열 구조의 전제 위에서 사회적 통합을 실현하고 유지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 협의민주주의 모델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즉 다수 지배의 원칙에 따르는 민주주의적 게임의 규칙 아래서는 영구히 소수로 남을 수밖에 없는 자들을 체제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권력분점을 강제하는 협의적 모델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곰곰이 따져보아야 할 점은 한국의 지역주의가 유럽 일부 나라들의 다언어.다종교.다종족적인 구조화된 균열 구조와 같은 것인가라는 점이다. 한국 지역주의의 가장 커다란 폐해는 정치인들이 그것을 당리당략적으로 이용한 데 기인한 것임을 감안한다면 그것을 협의민주주의를 운용하는 유럽 국가들의 균열 구조에 등치시키는 것은 논리적인 비약에 불과할 것이다. 더욱이 노 대통령의 국민 통합형의 정치를 위한 연정과 지역주의를 극복하기 위한 선거제도의 개혁은 오히려 지역주의를 제도적으로 고착화하고 구조화하는 역설적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둘째로는 연정의 명분으로 내세우는 상생과 공존의 통합형 정치의 논리적 근거가 허약하다는 문제다. 자유민주주의는 인민 주권의 원칙을 선거라는 제도를 통해 간접적으로 확보하는 장치이다. 권력이 선거를 통해 위임되는 경우에는 언제든지 권력이 남용될 가능성이 상존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한다. 국민의 자유와 권리는 복수의 정치 엘리트가 선거에서 유권자들의 지지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 구조를 통해서만 보장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민주주의는 하나의 목소리로 불리는 매끄러운 독창이 아니라 이질적인 목소리들이 미리 예정되지 않은 화음을 만들어내는 합창이라고 할 수 있다. 연정이라는 이름으로 야당을 권력을 행사하는 여당으로 포섭하려는 것은 민주주의의 필수불가결의 조건을 훼손하는 일이다.

다양한 이익을 주장하는 개인과 집단들의 이질적인 목소리들을 소모적인 갈등이 아니라 국가 발전의 원동력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정치적 리더십의 몫이다. 독재가 아니라 민주주의가 훌륭한 지도자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행 인제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