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09)-제79화 육사졸업생들(6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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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지금은 육·해·공군이 똑같은 계급장을 달고 있지만 6·25사변의 종반인 53년 봄까지도 3군이 각각 다른 계급 표시를 하고 있었다.
해방후 3군의 장군과정이 독자적이었던 만큼 합동작전이 요구되는 6·25라는 전쟁을 치르면서도 각군이 통합적으로 움직이기 보다는 오히려 독립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짙었다.
따라서 계급장까지도 서로 다른 모양으로 붙이고 다녀 타군의 상급자는 상급자로 보지 않는 배타적인 풍조가 있었다. 그런 풍조 때문에 육·해·공군이 함께 모이는 자리에서나 극장·식당·거리에서 마주칠 때도 서로 인사하는 일이 없었다. 심지어 위관급들은 후방에 나와 술을 마시고 나서 타군 장교들과 치고 받는 일까지 있었다.
이것은 우리 장교라도 계급만 높으면 경례를 붙이던 미국·영국등 참전국 군인들과는 너무나 판이한 현상이었다.
우리 국군의 그런 나쁜 풍토를 없애기 위해 제복은 다르다해도 계급장만은 통일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다.
3군과 해병대의 걔급표시를 롱일하는 실무작업을 해낸 키 멤버가 당시 국방부 인사과장으로 있던 3기생 이창우대령 (64·예비역소장·금산파이프회장)이었다. 그때 국방부장관은 신태영씨, 소관 국장인 제1국장은 주일대사로 있는 최경록씨였다.
그때의 육군 계급장은 위관의 경우 사각형 양철판에 소위 밥풀 모양의 네모를 붙였었다. 그래서 위관들을 가리켜 밥풀떼기 장교라는 속어까지 나왔었다. 영관은 같은 판에 태극마크를 넣었었다.
국방부가 계급장의 통일방식을 굳히고 각군에 의견을 내라는 공문을 시달한 것이 52년 5월이었다.
3군이 모두 통일한다는 원칙에는 찬성하면서도 육군은 새로 모집하자는 단서를 달았고 해·공군은 당시 각기 자군이 사용하던 계급장으로 통일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결과적으로 새로 공모해 당선되는 것을 사용키로 하여 전시중에 계급장 도안을 공모했다.
53년4윌 근1년만에 지금 사용하고 있는 계급장으로 전군이 통일했다.
여기서 각 계급강에 대한 당시 도안자의 설명을 듣고 넘어가는 것이 좋겠다.
위관의 경우 현재의 사각 다이어먼드로 만든 이유는 다이어먼드는 지하 (아직 낮은 곳이라는 의미)에 있지만 앞으로 가장 빛나는 보석이 될 것이라는 장래성을 의미한다고 한다.
영관의 경우 지금 모두 무궁화꽃으로 잘못 알고 있지만 사실은 대나무잎 9개를 원형에 붙인 것이다. 대나무는 지상에 있기때문에 다이어먼드보다 높아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대나무의 굳은 절개와 사철 시들지 않는 성심함을 반영한 것이다.
원래 공모작품은 대나무 잎들의 원형안에 아무것도 넣지 않았었으나 결정과정에서 위관의 다이어먼드를 박자는 의견이 나와 그대로 채택했다.
당시 장군 계급장은 지금과 같이 별이었는데 이것을 우리 고유의 상징으로 바꾸자는 의견이 나왔다. 국방부 인사국이 몇몇 고위장성에게 의견을 물었더니 그 소문이 퍼져 각군의 장군 제독들의 반대가 심했다.
그래서 흐지부지되어 그대로 쓰게 됐다.
별에 대한 장군들의 애착과 긍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당시 또 하나 기억나는 것은 51년 4월1일을 기해 육군이 전장병에 대한 각개점호를 실시한 일이다.
인사과장 이창우대령은 당시 군적이 제대로 돼있지 않아 누가 어디서 무얼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합리적인 군인사를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6·25 발발전 육본은 현재 용산에 있었는데 적에 서울을 내주면서 장병에 대한 인사기록부를 후송치못해 지하창고에 집어 넣었었다.
9·28수복후 돌아와 보니 문서가 전부 유실돼 버려 육군장병 전원이 군적없는 군인이 되어버렸다.
더구나 후퇴과정 등에서 부대가 해체되는 등 혼란을 겪어 아무나 나타나 『내가 ○○○중령이요』하면 그대로 믿어줘야 하는 판이었다.
15연대에서 생겼던 일인데, 하사관이 길가에서 중령계급장을 주워 중령이라고 속여 대대장까지 지낸 사람이 있다.
각개점호 때도 그는 중령으로 신고했다. 그뒤 조사과정에서 하사관 출신으로 밝혀졌지만 그때는 이미 이 주인공이 전사해버려 그대로 중령으르 인정키로 한 일도 있다.
각개점호는 전 장병이 어느 부대에서든 자신의 신분을 신고하면 신분증을 주고 그때부터 그 부대 요원이 되도록 한 것이다. 그뒤 장교는 신고는 하되 본래 소속부대로 복귀하도록 수정됐다.
어떤 사람은 10기생으로 육사에 합격한 친구의 이름을 대고 임관하여 장교로 근무하다가 뒤늦게 밝혀져 옷을 벗고 나간 일도 있다. 다 전쟁이 낳은 일화들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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