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무신 신고 학당 꾸리는 전직 장관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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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3면

2일 오전 7시30분 전남 장흥군청 지하 구내식당. 주민 70여 명이 '노력하고 준비하는 삶'에 대한 이동규 충남대 교수의 강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수강생은 농민.약사.지방의회 의장 등 30대 초반부터 85세 노인까지 다양하다.

이날 1시간여 전부터 나와 주민들을 맞이하고 행사가 끝난 뒤 강사를 배웅하는 등 조찬강연회를 주관한 사람은 교통부 장관(1983~86년)을 지낸 손수익(73)씨.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 '장흥학당'을 만들어 주민 의식교육에 여생을 보내고 있다.

"낙향 후 고향과 지방에 대해 알아야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것이 각계각층 남녀노소가 함께 공부하는 모임으로 발전했습니다." 취재를 한사코 거절하는 그의 표정에 낙향 생활에 보람을 느끼고 있음이 묻어났다.

손씨는 화려한 경력의 관료 출신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고등고시에 합격해 공직에 입문한 뒤 29세에 전남 나주군수, 전북 부지사, 경기지사를 지낸 뒤 산림청장과 내무부 차관,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장을 거쳐 교통부 장관을 지냈다.

손씨는 90년대 들어 장흥에 발길이 잦았다.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대형 정미소를 돌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장흥에서 지낼 때면 구두 대신 하얀 고무신을 즐겨 신었다. 가까운 거리는 자전거를 타고 다녔다. 한 주민은 "요즘도 동네 목욕탕을 이용하면서 남들이 버린 때수건과 면도기를 손수 치우는가 하면 수도꼭지를 잠그곤 한다"고 귀띔했다. 그의 이런 소탈한 모습이 소문을 타면서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는 식당 주인과 공무원.회사원 등 20여 명과 함께 93년 1월 장흥을 사랑하는 모임이란 뜻의 '애장회'를 만들면서 완전히 장흥에 정착했다. 매월 2, 16일 저녁 식당에서 만나 한 회원이 특정 주제에 대해 발표한 뒤 서로 의견과 생각을 나눈 다음 식사하면서 세상 사는 이야기 등을 하는 소학당(小學堂)을 열었다.

"지역이 발전하려면 주민 의식이 깨어야 한다"고 늘 강조하던 그는 94년 11월 '애장회'를 중심으로 사단법인 장흥학당을 개설했다. 매월 2, 16일 아침엔 조찬강연회를, 밤에는 '애장회' 회원들과 소학당 모임을 한 게 올해로 11년째다. 참가비 5000원씩 하는 조찬강연회는 지금까지 248회 열렸다.

한 공무원은 "초기엔 지방선거나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기 위한 것이라고 색안경을 끼고 보는 사람도 있었으나 매사에 정치색을 철저히 배제해 오해가 절로 풀렸다"고 말했다.

장흥학당 총무를 맡고 있는 방욱남(65)씨는 "돈이 연간 4000만~5000만원 드는데 회원 340명의 회비로는 모자라 20~30%는 손씨가 사비로 충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에서 내로라 하는 유명 강사와 인사 등을 자동차로 6시간가량 걸리는 장흥까지 초빙하는 일 또한 중앙에 두터운 인맥을 가진 손씨가 맡고 있다.

김인규 장흥군수는 "장흥학당이 지자체가 해야 할 일 중 하나인 주민 교육을 대신하고 있어 예산 지원을 받을 수 있는 명분이 충분함에도 손씨가 이를 거절하고 있다"고 고마워했다.

장흥=이해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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