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리케인에 찢긴 미국] "여긴 제3세계 … 미국이 부끄럽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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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리케인 이재민들이 3일 적십자사가 마련한 미 휴스턴 임시 대피소 게시판에서 가족을 찾는 사연이 적힌 쪽지를 살펴보고 있다. [휴스턴 AFP=연합뉴스]

▶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피했다가 1일 고향인 미시시피주 걸프포트로 돌아온 한 여인이 처참하게 부서진 자신의 집을 보고 흐느끼고 있다. 걸프포트는 뉴올리언스 등 다른 피해 지역에 비해 일찍 물이 빠졌다. [걸프포트(미시시피) AFP=연합뉴스]

▶ 3일 물이 빠지지 않은 뉴올리언스 주택가 앞에 시신이 떠 있다. 현지 주민들은 "길거리와 주택가 다락에도 시신이 있다"고 말했다. [뉴올리언스 AP=연합뉴스]

허리케인 카트리나가 미국 남부 미시시피와 루이지애나주에 상륙한 것은 지난달 29일 오전(현지시간). 불과 엿새 전이었다. 그 후 며칠 새 초강대국 미국의 자존심은 휴지처럼 구겨져 땅에 떨어졌다. 캐럴린 킬패트릭(미시간.민주당) 하원의원은 카트리나 상륙 이후의 상황을 "나는 미국이 부끄럽다"는 한마디로 압축했다.

◆ "미국이 아니라 제3세계"=워싱턴 포스트는 3일 뉴올리언스 I-10번 고속도로에 만들어진 노상 수용소에서 이틀을 보낸 이재민의 참상을 소개했다. 신문은 "데비 브룩스는 에티오피아에 가본 적이 없지만 뙤약볕과 굶주림 속에서 가족들이 시들어 가는 걸 지켜본다는 게 뭔지 알게 됐다"며 "여기는 미국이 아니라 제3세계"라고 보도했다. CNN과 NBC 등 미 주요 방송들에서는 허기에 지쳐 늘어진 갓난아이를 안은 젊은 어머니들이 울음을 터뜨리며 하소연하는 모습이 계속 방영되고 있다. 뉴올리언스.빌록시.베이 스트리트 등 침수 피해지역마다 쓰레기와 오물 더미가 산을 이루고 있다. 굶주림에 지친 폭도들이 상가를 약탈하는가 하면, 텅 빈 도시 곳곳에서 건물들이 방화로 불타고 있다. 언론들은 "세계 최강국이라는 미국에서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는가"라며 충격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 드러난 미국 사회의 모순=카트리나는 미국 사회를 포장해온 온갖 외피를 한순간에 벗겨버렸다. 이로 인해 그동안 덮어뒀던 인종차별.빈부격차 등 수많은 모순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는 지적이다.

피난을 떠나지 못한 채 뉴올리언스 수퍼돔에 수용된 2만5000여 명의 이재민 중 99%가 흑인이었다. 흑인 목사인 알 샤프톤은 폭스TV에 출연해 "미국에서 피부 색깔이 곧바로 소득 수준을 결정한다는 것은 새삼스러운 얘기가 아니다"고 비난했다. 재해 현장에선 "우리가 백인이면 정부의 지원이 이렇게 더디게 이뤄졌겠느냐"는 비난이 거세게 일고 있다.

그런 가운데 일부 도시에선 휘발유 값이 평소보다 3배 이상 폭등했다. 수도인 워싱턴 주변에서조차 일부 주유소가 가격 폭등에 대비해 휘발유 판매를 중단했다. 이 때문에 문을 연 주유소마다 기름을 넣으려는 차량 행렬이 장사진을 이루고 있다. 큰 통을 들고 와 가득가득 기름을 채워가는 사람도 부지기수다. 뉴욕 등 다른 대도시에서도 기름값이 폭등하고 사재기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 천문학적 피해 보상 주체 논란=파이낸셜 타임스(FT)는 3일 "피해 보상을 둘러싸고 격심한 논란이 예상된다"고 보도했다. FT에 따르면 미국의 경우 폭풍 피해는 보험회사가 책임지는 반면, 홍수로 인한 재산상의 피해는 정부가 맡도록 규정돼 있다. RMS는 "피해 지역 안의 재산상 피해는 주로 침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이 논리가 받아들여질 경우 미 정부는 천문학적 피해 보상을 책임져야 한다. 반면 영국의 일요신문 옵서버는 세계적인 보험그룹 로이즈의 내부 문건을 인용, 미국과 유럽의 보험업계가 400억 달러(약 40조8000억원)에 달하는 보험금 청구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이는 2001년 9.11테러 때와 맞먹는 규모다.

피해액도 눈덩이처럼 불어날 태세다. 미 자연재해 평가기관인 리스크 매니지먼트 솔루션스(RMS)는 "카트리나로 인한 경제적 피해가 1000억 달러(약 102조원)를 넘을 것"이라고 밝혔다. 희생자가 예상을 훨씬 뛰어넘어 1만 명에 이를 것이란 주장도 제기됐다.

◆ 또 다른 대형 허리케인 상륙 가능성=AP통신은 콜로라도주립대 기상학자들의 말을 빌려 "강력한 허리케인이 이달 중 멕시코만 일대를 휩쓸 가능성이 43%며 10월 중 강타할 확률이 15%"라고 전했다. 평균적으로 허리케인이 멕시코만 해안에 상륙할 확률은 9월이 27%, 10월이 6%다. 결국 연말까지 6개가량의 허리케인이 발생해 3개 정도가 3등급 이상으로 발달하고, 이 중 1개가 본토를 덮칠 것 같다는 게 이들의 결론이다. 현지 구조 관계자들은 "허리케인은커녕 약한 열대성 비바람만 몰아쳐도 엄청난 피해가 날 것"이라고 우려했다. 현재 80% 이상이 잠겨 있는 뉴올리언스의 경우 물이 완전히 빠지려면 최대 80일가량이 필요하다.

워싱턴.뉴욕=김종혁.남정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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