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 자! 이제는] 15. 강경노조에 기 못 펴는 '금융 경쟁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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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 자체보다 노조와의 갈등을 푸는 게 사측의 가장 어려운 문제일 줄은 미처 몰랐다. 회사의 부실자산을 털어내고 새 상품을 개발해 경쟁사와 싸우기도 바쁜데, 노조를 달래느라 마신 폭탄주만 해도 2000잔에 달한다."

부실한 제2금융권 회사를 인수해 최근 가까스로 정상화시킨 서울의 한 상호저축은행 대표는 지난 2~3년간 노사 문제 때문에 겪었던 고충을 이렇게 털어놨다.

씨티은행도 최근 노사 문제로 곤욕을 치렀다. 씨티노조는 한미은행 출신에서 임원이 적게 발탁됐다는 이유로 본점 로비에서 올 봄 두 달가량 농성을 했으며, 회사가 발표한 올해 상반기 경영실적이 허위라는 내용의 보도자료를 냈다. 리처드 잭슨 부행장은 "사측도 반박 기자회견을 열고 싶었으나 자제했다"며 "합병 이후 해고된 사람은 없고 신규 채용이 500여 명이나 늘 만큼 직원을 존중해 왔는데 노조가 왜 회사의 이미지를 스스로 깎아내리는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처럼 노조 문제로 어려움에 처한 금융사는 한둘이 아니다. 금융사 합병은 으레 대규모 파업으로 이어지고 노사.노노 갈등으로 합병 금융사는 오랫동안 몸살을 앓아왔다. 동원증권과 한국투자증권이 합병해 생긴 한국증권의 홍성일 사장은 최근 5개월간 사무실과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노조 문제로 시름했다. 노조원들이 합병에 따른 위로금 지급, 임금 인상 등을 요구하며 파업을 했기 때문이다. 파업은 영업력을 크게 떨어뜨렸다. 회사에 따르면 22조원이던 한투의 펀드 수탁액은 파업기간 동안 2조원 가까이 줄었다. 회사 관계자는 "노조가 좀 더 유연한 협상 자세를 보였더라면 손실을 줄일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신한은행과 조흥은행의 통합도 난항이 예상된다. 조흥노조는 두 은행의 통합실무를 맡을 통합추진위원회와 별도로 외부 인사들이 참여하는 합병검토특별위원회 설치와 조흥은행 행명 지키기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노조가 금융산업의 경쟁력 자체를 약화시키려 한다는 비판도 있다. 최근 은행 등과 2005년 임금단체협상에 들어간 금융산업노조는 인수.아웃소싱 등 경영과 인력에 관한 계획 전반을 노조와 합의해야 한다는 안건을 제시했다. 그런가 하면 이번 임단협엔 '점심시간을 12시에서 13시까지 보장하고 이 시간에는 영업활동을 금지한다'는 요구를 사측에 제시하기도 했다. 국민의 불편을 초래하고, 경영권 간섭의 소지가 큰 내용이다.

이같이 후진적인 노사관행을 수술하지 않으면 금융 경쟁력 확보가 어렵고, 나아가 한국을 동북아 금융 허브(중심)로 만들겠다는 구상은 공염불이 될 공산이 크다고 전문가들은 말한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경영 환경이 정착되지 않고선 금융 허브는 말할 것도 없고 금융 회사의 아시아 지역본부도 유치하기가 쉽지 않다. 치열하게 경쟁하기도 버거운데 한국만의 경영관행과 씨름할 외국 기업은 없기 때문이다." 세계적 회계.경영 컨설팅 업체인 딜로이트의 빌 파렛 글로벌 CEO가 최근 한국 경제의 문제점에 대해 던진 충고다.

김동호.김준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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