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청<104>진보당사건(59)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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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사형수 조봉암에 대한 재심청구서에 대해 대법원측은 반응이 없었다. 길은 정치적 구제뿐인 듯했다. 그래서 관계자들은 연결되는 모든곳을 노크했다. 치안국장을 지냈고 당시 자유당 부총무였던 이성주씨도 구명호소를 받아들였던 몇 안되는 사람중의 하나다. 그러나 이성주씨는 그들의 구명운동이 도리어 죽산의 죽음을 재촉한 결과가 된듯하다는 회한을 간직하고 있다는 이씨의 회고.

<선거쟁점화 꺼려>
『59년 봄이었다. 윤길중씨와 이재춘씨가 극비리에 나를 만나자고 했다. 당시 자유당안의 분위기로는 죽산의 구명운동은 엄두도못낼 때인데 두분은 원내부총무인 내게 구명공작을 부탁하는 것이었다. 평소 나자신이 죽산과 때론 마작용 즐기는둥 친하게 지냈고 고향친구들의
부탁인데다 진보당이 공산당지령이 아니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던 탓에 구명운동을 약속했다.
이때 그들은 구명운동에 성공하면 진보당은 이대통령을 위해 적극적인 선거운동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이 구명운동이 죽산의 처형을 재촉했다는 느낌이 든다.
당시는 라이벌 의식등 이박사의 정신상태가 이런 이야기를 직접 들이밀어서는 효과가 없을 듯한 상태여서 당내 온건파를 중심으로 은근히 분위기 조성을 해나갔다. 그때는 선거를 앞두고 거의 매일 반도호텔(현 롯데호텔)에서 정부여당 연석회의가 열렸다. 어느날 이회의에서 나는 정치생명을 걸고 죽산의 구명을 제안했다. 당시 시국으로는 선거를 앞두고 진보당의 힘도 업어야 된다는 데서 나의 제안은 상당한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
내가 죽산 구명을 제안한 날은 대부분이 찬성을 해 이야기가 풀리는 듯했다. 그런데 다음날 장경근이 반대를 하고 나섰다. 그때는 이승만 이기붕 장경근선으로 굳어져 있을 때라 장이 반대하고 나서자 모두들 유구무언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뒤에도 어느 정도는 희망이 보여 나는 구명운동을 은밀히 계속했는데 강경파 사람들이 처형을 서둘러 차라리 구명운동을 안했더라면 그들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진보당사건은 당시 자유당의 입장에서 볼때 이박사에 반대한다는데서 적대감은 가지고 있었지만 공산당으로는 보지 않았다. 단지 자유당의 강경파들이 이박사에게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몰아붙인 겻이라고 말할수 있다.
구명운동이 죽산의 목숨을 재촉한 것같다는 추리는 한가닥 근거가 있는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의 구명운동은 죽산에게는 좋은 영향을 주지 못했다.
그 무렵 한일회담대표단이 일본에 다녀와 대통령에게 보고를 할 때도 죽산문제가 포함되었었다고 당시의 경무대비서 P씨는 회고했다. 일본의 좌파들이 그들 한국측대표단을 가리켜 죽산모살의 책임자들이라고 공격했다는 것이 보고의 내용이다.
아뭏든「내년이면 대통령선거를 치러야하는데 죽산문제가 쟁점으로 남아있는 것은 좋지않다」 는 것이 자유당강경파로선 내림직한 결론이었다.

<변호인단도 몰라>
그 위에 자유당 온건파, 그리고 대통령의 과거 측근들의 구명움직임이 어떻게 발전될 것인지도 한가닥 불안의 요인일 수 있었고….
이런 저런 사정들이 겹쳐 죽산의 사형집행은 갑작스레 다가왔다.
대법원은 7월30일 조봉암피고인의 재심청구를 이유없다고 기각했다. 재심청구 제1의 사유-즉 양을 심문한 특무대 고영변수사관의 불법체포, 불법감금에 대해 대법원은 이렇게 말했다.
「사법경찰관의 직무에 관한 죄가 판결로 증명되거나 혹은 확정판결을 얻을수 없을 때의 두 경우는 재심의 사유가 된다. 그러나 확경판결을 얻을수 없을 때라는 것은 공소시효만료등으로 검사의 공소제기를 기대할수 없을 때를 말하는 것이지 검사가 공소권을 행사하지 않거나 기소유예처분으로 확정판결을 얻을수없는 때는 이를 포함하지 않는다고 해석해야 한다」는것.
양명산이 간첩이 아니라 HID요원으로서 중요정보도 가져왔다는 등의 사실을 제시한 재실 사유에 대해서도 재심 심판부는 「새로 발견된 증거라고 할수없다」고 했다.
결국 조봉암에 대한 재심은 경찰이 고영변을 기소해주지 않는한 생겨나지 않는다는 것이 심판부의 기각 판결이었다.
대법원의 재심 기각결정문이 경찰에 통고된 것은 하오3시였지만 변호인단에 송달된 것은 하오5시30분. 당시의 신문은「조피고인에 재심청구기각을 대법원 심판부가 합의한 것은 30일 하오3시였으며 대검찰청은 그 즉시 통고를 받고 긴급회의를 열어 다음날 사형을 집행하기로 결정했다」고 그 과정을 뒷날 보도했었다.
그랬지만 변호인단은 모든 일이 이처럼 급속도로 진행되고 있는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때를 말하는 전진보당 조직부장 이명하씨의 회고.
『재심기각 결정문은 30일하오5시30분에 신태옥변호사 사무실로 송달됐읍니다.』
신변호사는 즉시 김춘봉 김봉환 윤길중 김달호등 변호인단, 그리고 나를 포함해 조규희등 진보당 농부들을 불렸읍니다. 우리는 기각 결정문을 검토하고 재재심청구서를 곧바로 제출키로 했읍니다.

<장택상씨가 메모>
밤늦게까지 재재심청구서를 작성하다 끝을 맺지 못하고 다음날아침에 만나 마무리짓기로 했읍니다. 31일아침 모두들 모여 재재심청구서를 다듬고 있는데 호정이 오더니<이상합니다>라고 해요. 호정의 말인즉<상오 9시에 면회를 갔더니 형무관이 오늘은 죽산선생께서 기분이 좋지 않아 아무도 면회하지 않겠다고 하니 그냥 돌아가라고 해요. 아버님은 한번도 거절한 일이없는데 이상합니다>라는 거예요. 신변호사가<큰일났다. 이러고 있을때가 아니다. 각기 나가서 알아보자> 그러더군요. 윤길중씨는 장택상씨에게 갔다오겠다고 하더군요.우리는 윤길중씨 댁에서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읍니다. 한참을 헤매다 윤길중씨 댁에 모여 초조하게 소식을 기다리고 있는데 장택상씨가 메모를 보내왔어요. 죽산 처형… 통곡 통곡」이라는 단 여덟자의 메모였읍니다.
우리는 말을 잃었고 모두들 눈앞이 캄캄해졌읍니다. 믿어지지 않았고, 믿고 싶지도 않았읍니다. 멍해겼다가 한참후에야 눈물이 쏟아지더군요. 어떻게 헤어졌는지 모릅니다. 눈물을 머금고 내가 정신없이 달려간 곳이 약수동 죽산자택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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