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바와 국교정상화 선언한 오바마, 미국판 포용정책 나섰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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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 쿠바가 53년의 적대관계를 접고 국교정상화를 선언했다. 양국이 냉전 잔재를 청산하고 화해와 협력을 추구하는 새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미국이 중국ㆍ베트남에 이어 옛 소련의 전초 기지였던 쿠바에 문을 열면서 냉전 시대의 적대국은 이제 북한만 남게 됐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17일(현지시간) 특별 성명에서 “수십년간 미국의 국익 증진에 실패한 낡은 접근방식을 버리고 쿠바와 미국 국민, 전세계를 위한 더 나은 미래를 선택했다”고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은 쿠바의 고립을 목표로 한 정책을 추진했지만 쿠바 정부에 자국민을 억압하는 명분을 주는 외엔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며 “이제는 새로운 접근에 나서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거의 같은 시간에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도 “쿠바는 미국과의 관계 회복을 환영한다”고 밝혔다. 그는 대국민 TV연설에서 “쿠바와 미국은 인권과 주권 문제 등에서 아직 이견이 존재하지만 양국은 세련된 태도로 차이를 받아들이는 것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쿠바는 수감 중인 미국인 앨런 그로스를 5년 만에 석방해 미국으로 송환했고, 미국 스파이 혐의로 복역 중이던 쿠바인 한 명도 석방했다. 미국도 장기 수감 중인 쿠바 정보 요원들을 내보내는 상응 조치에 나서기로 했다.

미국은 수개월내 쿠바 수도 아바나에 미국 대사관을 다시 열기로 했으며 쿠바를 테러지원국에서 해제하는 방안도 검토하기로 했다. 또 로베르타 제이콥슨 국무부 차관보가 내년 1월 쿠바를 방문해 이민, 마약 퇴치 등 양국 현안을 협의하고 여행·송금 제한 완화와 함께 미국 금융기관이 쿠바에 계좌를 개설할 수 있도록 하는 등 금융 제재 수위도 낮추기로 했다. 1959년 공산화를 선언한 피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이 미국기업의 자산을 몰수함으로써 1961년 국교가 단절된 뒤 53년만의 역사적 사건이다.

오바마 대통령은 2008년 대선 후보 때 “북한ㆍ이란ㆍ쿠바의 지도자들과 만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6년이 지난 지금 세 나라 중 오바마 대통령과 접촉하지 않은 지도자는 김정은 북한 국방위 제1위원장 뿐이다. 지난 16일 오바마 대통령은 미국 정상으론 국교 단절 후 처음으로 카스트로 의장과 전화 통화를 했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지난 9월 유엔총회 참석차 미국 땅을 밟았고 오바마 대통령과 통화도 했다. 조시 어니스트 백악관 대변인은 “오바마 대통령의 쿠바 방문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고도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의 쿠바 껴안기는 비핵화 진정성을 보여주면 북한도 포용할 준비가 돼있다는 신호탄 아니냐는 해석도 나온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미국은 공산당이 지배하는 중국과 35년 이상 관계를 다시 맺고 있고, 다른 어떤 냉전 대결보다도 미국인이 희생했던 베트남과도 20여전 관계를 정상화했다”고 말했다. 쿠바만 아니라 북한에도 적용 가능한 메시지다. 이날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 세르게이 랴브로프 러시아 외무차관 등 국제 사회는 일제히 환영의 뜻을 표했다.

워싱턴=채병건 특파원 mfemc@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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