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아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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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이웃집에서 돈 1만원을 훔친 아들을 경찰에 고발한 어머니가 있었다. 경찰은 정상을 참작, 가정으로 돌려보냈다.
초 나라의 직궁자 얘기가 생각난다. 어느날 자기 아비가 양을 훔친 것을 보고 임금에게 고발했다.
임금은 그 아비를 잡아다가 사형에 처하려 했다. 이를 본 직궁자는 눈물을 홀리며 대신 벌을 받겠다고 청원했다. 『아비가 양을 훔쳤는데 그것을 고발한 것은 미덥지 아니하오? 아비의 죽음을 대신하는 것은 또한 효성스럽지 않소? 미덥고 효성스럽거늘, 저를 죽이면 장차 이 나라에 죽지 않을 자, 누가 있겠습니까?』
초왕은 이 말에 감동해 그를 놓아주었다.
진나라 여부위가 지은 사논서 『여씨 춘추』에 나오는 고사다. 『논어』에도 비슷한 얘기가 있다. 어느 날 섭공이 공자에게 말했다.
『우리 마을 사람들 가운데 몸을 곧게 갖는 자가 있습니다. 제 아비가 양을 훔쳤는데 자식이 그것을 증언했습니다.』
공자는 대답했다.
『우리들의 「곧은 사람」은 다릅니다. 아비는 자식을 위해 숨기고, 자식은 아비를 위해 숨기면, 곧은 것이 그 가운데 있습니다. (…부위자수, 자위부은, 직인기중의).
우리 나라 고사에도 그런 얘기가 있었다. 태종 때의 일이다. 문신 이무가 정쟁에 몰려 옥에 갇혔을 때 그의 아들 이공유를 끌어다가 아버지 죄를 물으며 곤장을 쳤다. 그러나 아들은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태종은 이 말을 듣고 「이 나라에 그래도 의가 살아 있다』면서 아버지의 죄를 자식에게 증언토록 한 관계자들을 오히려 벌했다.
조선조의 명상 최명길이 파직 당한 얘기가 있다. 인조왕은 종이 상전을 고발하게 하고 아들이 아버지의 죄를 증언하게 한 책임을 물어 그를 파직시킨 것이다.
아들을 고발한 어머니의 경우 시대와 사람은 다르지만, 그 여운은 예나 이제나 다를 바 없을 것 같다.
『…죄과를 받아야 올바른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고발의 판은 검사의 얘기면 몰라도 「어머니와 아들」의 사이에선 자연스럽지 않다. 모자의 정리가 어디 그런가.
소설가 전영택씨 (작고)의 『나의 어머니』란 글에 이런 얘기가 있었다.
『어머니는 어린것의 피난처요, 호소처요, 선생님이요, 동무요, 간호부요, 인력거·자동차·기차 대신이요, 모든 것이다.』 그 어머니는 차라리 그 아들에게 따끔한 벌을 주고 남앞에선 그를 감싸는 편이 오히려 그를 곧게 만드는 교훈이 되었을 것 같다.
파출소에 끌고가 아들의 허물을 세상에 알리고 나서 얻은 것은 무엇일까. 그 아들이 얼굴을 들고 다니기 어렵게 된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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