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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삶의 향기

특별한 송년 낭독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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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6면

문태준
시인

지난주 토요일 오후 부산을 다녀왔다. 송정해수욕장의 흰 모래와 푸른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북카페, 쿠무다(Kumuda)에서 낭독회를 하기 위해서였다. 함양 대운사 주지 주석 스님이 쿠무다 대표를 함께 맡고 계셨는데, 나는 스님과 오랜 인연이 있었다. 스님은 카페를 복합문화공간으로 만들어 놓고 있었다. 내가 들른 토요일 오후에는 카페의 한쪽 공간에 김명희님의 자수전이 열리고 있었다. 쿠무다에서 마련한 낭독회에는 그동안 혜민 스님, 정호승 시인, 안도현 시인, 이춘호 동요 작곡가 등이 다녀갔다고 했다.

겨울의 흰 빛이 환하게 내리는 가운데 독자들과 함께 시를 읽었다. 한 해가 저물어가는 때에 우리는 창문 바깥의 나목들을 바라보고, 또 먼 바다를 바라보며 시를 맘껏 즐겼다. 가수 이승훈님의 축하 공연 무대도 이어져 흥을 보탰다. 쿠무다는 산스크리트어로 ‘하얀 연꽃’을 뜻한다고 했다. 카페 쿠무다에는 겨울의 흰 빛이 연꽃처럼 활짝 만개해 있었다.

  또 얼마 전에는 시섬문인협회에서 마련한 낭독회에 다녀왔다. 시섬문인협회는 작고한 박건호 작곡가와 인연을 맺은 분들이 만들었다고 했다. 1949년 원주에서 태어난 박건호 선생은 2007년 작고할 때까지 대중음악 작사가로 명성을 날렸다. 그는 박인희의 ‘모닥불’, 조용필의 ‘단발머리’ ‘모나리자’, 이용의 ‘잊혀진 계절’, 나미의 ‘빙글빙글’ 등 수많은 히트곡을 냈다. 그러나 그가 여러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었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낭독회 회원들의 얘기에 따르면 박건호 선생은 생전에 문인들과 많은 교류를 했고, 시인으로 불리길 간절하게 원했다고 했다. 박건호 선생이 이 모임의 초대 회장을 한 이후 지금까지 연말이면 시낭송회를 열어왔다니 실로 놀랍고 아름다운 인연이라 하겠다. 회원들은 “뤼브롱 산에 석양빛이 물들면/ 그리워지는 나의 소녀야/ 나는 너에게 고백하지 못하고/ 밤이 새도록 가슴 태웠네”라고 쓴 박건호 선생의 시 ‘뤼브롱 연가’를 낭송했고, 본인들이 올해에 쓴 신작시를 낭송했다. 그뿐 아니라 회원들의 하모니카 연주, 기타 연주와 노래, 판소리 공연, 색소폰 연주 등이 이어져 무대는 한껏 달아올랐다.

 지난달 말부터 이달 중순에 걸쳐 내가 함께한 낭독회만도 꽤 여럿이었다. 인천의 옛 제물포구락부에서 열렸던 낭독회도 인상 깊었고, 대학로의 책방에서 열렸던 낭독회도 기억에 남아 있다. 특히 큰 무대는 아니었지만 책들이 여기저기 차곡차곡 쌓인 소박한 책방에서 아주 작고 낮은 의자에 앉아 나의 미발표 신작시들을 독자들과 함께 먼저 읽어보는 경험은 새로웠다.

 송년의 때에 이러한 낭독회가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고무적인 일이다. 사실 빛이 환한 겨울 오후에, 혹은 혹한의 겨울밤에 시를 함께 읽기 위해 사람들이 한곳에 모인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물질적인 이익을 먼저 계산하는 이 시대에 말이다.

 송년의 때에 스님이 시를 읽고, 차를 마시러 온 엄마가 시를 읽고, 정치가가 시를 읽고, 한국어를 갓 배운 외국인이 시를 읽고, 수능을 끝낸 고등학생과 취업을 준비하는 대학생이 시를 읽고, 퇴근한 직장인이 시를 읽는 것을 들었다. 조금은 서툴러도 좋았다. 목소리의 두께와 억양과 읽는 속도가 다 달라서 좋았다. 시를 읽을 때 수줍어 뺨이 석류처럼 붉어졌지만, 얼굴에는 내내 미소가 가득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악의도, 다른 사람에 대한 비하도 없는 그야말로 부드럽고 안온하고 순일한 기쁨 그 자체였다. 나는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시인이라고 생각했다.

 김종삼 시인이 시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에서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되므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 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아닌 시인이라고” 쓴 것처럼.

문태준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