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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으로 파고든 테러의 공포

중앙일보

입력

한 마리의 ‘외로운 늑대((lone wolf·자생적 테러리스트)’가 인구 475만명의 호주 최대 도시 시드니 전체를 패닉 상태로 만들었다.

15일 시드니의 금융중심가인 마틴플레이스에서 발생한 무장 인질극은 테러가 이미 시민들의 일상이 벌어지는 골목으로 파고들었음을 의미한다. 흰색 셔츠에 검은 모자를 쓰고 수염을 기른 테러범은 샷건으로 무장하고 출근길 시민들이 목을 축이는 초콜릿 카페에 들이닥쳤다. 마틴플레이스는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인 키아누 리브스가 몸을 뒤로 젖혀 총알을 피하는 유명한 장면을 촬영한 광장으로 평소 유동인구가 많은 곳이다.

이번 테러는 이슬람 수니파 무장세력인 이슬람국가(IS)를 추종하는 자생 테러리스트의 소행으로 보인다. 인질범은 경찰에 IS 깃발과 토니 애벗 총리와의 대화를 요구했다고 호주 최대일간지 시드니모닝헤럴드(SMH) 인터넷판이보도했다. 시드니 무슬림 커뮤니티의 한 지도자는 “테러진압 경찰이 이날 4~5차례 전화를 걸어 급히 IS 깃발을 찾을 수 있는지 여부를 물어왔다”고 말했다.

IS 깃발은 인질범이 여성 인질 2명에게 창 밖에서 보이도록 들고 있게 한 검은색 깃발과는 다르다. ‘알라 외에 다른 신은 없다’는 무슬림의 신앙고백(샤하다)이 적힌 건 같지만 문양이 조금 다르다. 이 무슬림 지도자는 인질범이 IS와 반목하는 알카에다 조직인 ‘자브하트-알-누스라’의 일원일 가능성을 언급했다. IS 추종자가 IS 깃발을 소지하지 않고 경찰에 요구하는 게 이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받은 IS 깃발을 태워 반감을 표시하려 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IS 추종자건 그 반대편이건 시민들의 공포는 다를 게 없다. 중동지역에서만 벌어지는 것인 줄 알았던 테러가 생활 속으로 파고 들었기 때문이다. 한 교민은 “최근 몇 달 사이 이슬람 무장세력들이 호주에서 테러를 벌일 가능성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막상 현실이 되고 보니 더욱 공포스럽다”고 말했다. 또 다른 교민은 “최근 시내 중심가에 경찰 경계가 더 삼엄해졌고, 몇 명이 체포됐다는 이야기도 있었다”고 말했다.

호주에서는 87년 멜버른 교외에서 총기 난사사건으로 7명이 살해되고, 96년 포트 아서에서도 총기난사로 35명이 살해당한 사건이 발생했었다. 하지만 이 사건들은 정신이상자 등의 소행이어서 재발 가능성이 적지만 이번 사건은 이라크에서 진행되고 있는 IS 격퇴전에 호주가 지원을 계속하는 한 발생 가능성이 지속되는 상황이다. 역시 전쟁에 참여하고 있는 캐나다의 수도 오타와에서도 지난 10월 IS에 동조하는 ‘외로운 늑대’에 의한 무차별 총격 사건이 발생, 테러의 일상화가 이미 현실이 되고 있다. 게다가 지난달 말 호주 서부 퍼스의 이슬람 사원에 돼지 머리와 내장을 던지는 등 이슬람 증오사건도 발생하고 있어 외로운 늑대들을 더욱 자극할 우려가 크다.

SMH도 “일상의 공포 조성이 이번 테러의 목적”이라고 보도했다. 신문은 “테러범이 카페 방문과 같은 일상 생활을 형언할 수 없는 공포의 순간으로 만들었다”며 “이번 인질극이 시드니나 여타 도시를 겨냥한 계획된 유사 공격의 시작일 수 있다”고 우려했다. 신문은 “악당의 사악한 생각까지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덧붙였다.

현지 경찰의 입장은 그래서 더욱 조심스럽다. 공포의 전염의 막아야 하기 때문이다. 뉴사우스웨일스 주 경찰청의 캐서린 번 부청장은 “현장에 30명 미만의 인질이 억류됐다. 부상자는 없으며 무장 범인과 계속 접촉 중”이라고만 밝힐 뿐 자세한 현장 상황은 함구하고 있다.

한편 인질로 잡혔다 빠져 나온 교포 여대생 배모씨는 괴한이 침입했을 때 스마트폰 메신저를 통해 곧바로 상황을 외부에 알렸다. 이 메시지가 지인들 사이에 퍼지면서 언론과 현지 공관에서도 배씨가 인질로 잡힌 사실을 알게 됐다. 카페에서 종업원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배씨는 한국에서 살다 호주로 건너가 호주 시민권을 획득했으며, 어머니도 현지에 함께 머물고 있다고 한다.

대사관은 홈페이지에 공지를 띄우고 “시드니 카페 인질극과 비슷한 사건이 여타 지역에서도 발생할 수 있으니 호주 내의 동포와 여행자들은 가급적 불필요한 외출을 삼가는 등 신변 안전에 각별히 유의해달라”고 당부했다. 호주 이민시민권부에 따르면 올 1월 현재 호주에 있는 우리 동포 수는 15만 1000여명(호주 시민권 획득자 포함)이다. 시드니가 주도인 뉴사우스웨일스주에는 8만 2900여명이 살고 있다.

신경진·유지혜 기자 xiao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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