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양극화’ 아메리칸 드림의 종말…돈을 모아도 거대 자본 아래서 서빙만 지속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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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맨해튼은 전세계 금융 중심지이자 자본주의를 대표하는 지역이다. 하지만 기자가 지난주 찾아간 뉴욕은 중간이 없는 양극화의 단면을 보여주고 있었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조셉 스티글리츠 교수가 2012년 “아메리칸 드림은 더 이상 없다”고 한 것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일부 학자들은 "자본주의 몰락의 서막"이라고 했다.

기자가 뉴욕에 도착한 건 지난 3일(현지시간)이다. 북미 최대 미술제 출장 차 마이애미에 갔다가 들른 것이었다. 록펠러 센터 앞 23m짜리 대형 트리엔 올 겨울 첫 조명이 켜졌고, 점등식을 보러 온 인파로 골목마다 북적거렸다. 화려한 뉴욕의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날, 뉴욕 대배심은 흑인 청년을 목 졸라 숨지게 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백인 경찰을 기소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도심 시위가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청년들은 도로를 점거하며 “정의가 사라졌다”고 외쳤다. 많은 언론이 “2011년 ‘월가 점령(Occupy Wall Street)’때와 닮아있다”고 분석했다. 흑인과 히스패닉계는 물론 백인 청년까지 가세한 시위대가 인종차별 뿐 아니라 경제적 불평등에 대해서도 외치고 있다는 것이다. 이날 시위에서 만난 식당 종업원 파블로(28)도 “가게를 둘러보면 늘 백인은 주문하고 유색인종이 주문을 받는다”며 “경제가 좋아진다 한들 부자들 주머니만 두둑해지는데, 국가 시스템과 법까지도 우리를 불평등하게 대한다”고 했다.

실제로 뉴욕은 물론 마이애미에서도 미국의 경제 회복세는 눈에 보일 정도였다. 고급 리조트 시설과 도심의 고층 빌딩은 공사가 재개됐고, 호화 레스토랑과 호텔은 예약이 안돼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그 공사장의 일꾼도, 호텔과 레스토랑의 종업원도 하나같이 흑인이 아니면 히스패닉계였다. 뉴욕에선 서비스 팁도 18~20%이나 되는데, 이 팁이 없으면 종업원들은 생계 유지가 쉽지 않다고 했다. 이들의 최저 임금은 시간당 10달러 안팎으로 물가에 비하면 턱없이 적다. 팁이 ‘의무적으로 내야 할 돈’이 된 것도 이 때문이다.

미국 대형은행에서 일하는 프랑스인 이민자 폴(30)은 “나처럼 회사에서 수십억 원을 들여 변호사비를 내주지 않는 한 1년 내에 영주권 얻기는 쉽지 않다”고 했다. 실제로 그의 흑인 이민자 친구들은 10년째 여전히 영주권이 없다고 했다. 그는 미국을 일컬어 '돈이 있어야 시민도 될 수 있는 나라'라고 했다.

미국식 자본주의에 중간은 없었다. 얼마 전 오하이오 주지사 존 카시히는 “미국은 백인과 흑인, 부자와 가난한 자로 극단적으로 갈려있다”며 “간극이 메워져야 미국 사회도 제대로 돌아갈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아메리칸 드림을 꿈꾼 다수의 이민자와 유색인종에게 있어 간극을 메울 수 있는 방법은 없어 보였다.

이들이 영주권을 위해 1~2달러라도 팁을 더 받으려 아웅다웅하는 사이, 대형 자본들은 고급 변호사를 써가며 자신의 부를 함께 축적할 사람들의 이주를 돕고 있었다. 맨해튼 한복판에서 “숨을 쉴 수 없다” “정의 없인 평화도 없다”고 외치는 시위대를 향해, 일부 고급 차량 운전자들은 사납게 경적을 울려대고 있었다.

뉴욕=유재연 기자 que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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