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병대 공격받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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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앞에서 보았던 바와 같이 일본인 대농장제도의 형성주축은 명치일본의 권력구조에서 정상부를 차지하는 봉건귀족·재벌귀족·정상형기업가들이었다. 그들에게 공통된 의식구조는 대농장제도의 형성이 한국에 대한 식민지정책의 기조임을 확신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대농장제도를 형성하는 과정에서 무장의병대로부터 끊임없는 공격을 받아왔다. 무장의병대의 공격을 가로막았던 것이 일본의 국가권력을 주축으로 하는 군경합동수비대였다. 농장마다 무장경비대를 편성하여 의병대와 교전하는 사태가 전개되어왔던 만큼 그들은 권력이나 재력으로 농장을 창설하였다고 생각하기에 앞서 무력으로 농장을 창설한 것으로 믿는 의식구조를 지니게 되었다.
일본인 농장들이 소유한 총토지면적은 1929년의 16만7천2백24정보에서 30년대에도 계속 증가하여 20만정보대로 확대한 것으로 추정할수 있다. 그렇다면 약30만명의 한국인 소작농이 일본인 농장에서 일하였을 것으로 추정할수 있다. 그러면 30만명의 한국인 소작농과 그가족들은 어떠한 신분적인 처우를 받았는가.
먼저 일본인 학자들의 의견을 들어보기로 하겠다. l930년대 말의 한국농촌에 대하여 광범한 실태조사를 벌였던 대야보구수는 한국인 지주와 일본인 중소지주들은 소작농들과 정상적인 지주대소작인관계를 맺고 있으나 일본인 농장에 예속되어 있었던 한국인 소작인들은 소작인의 신분으로 다루어지는 처지에 있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찾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일본인 농장에 예속되어 있었던 한국인 소작인들이 지녔던 신분의 실상은 어떠한 것이었는가.
동경대학의 농업경제학 교수인 동전정일은 일찌기 일본인 농장에 예속된 한국인 소작인의 신분을 소작농이 아니라 임금노동자로 볼수밖에 없는데, 다만 상공업의 임금노동자와는 달리 계약임금을 받지못하는 처지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한편 조선총독부의 소작관으로서 지주대소작인 관계의 조정역할을 맡고 있었던 구간건일은 미국의 엽연초나 면화를 재배하는 플랜테이션(plantation)에서 사역되고 있는 흑인노동자인 크러퍼(cropper)의 지위와 비슷한 것으로 단정하였다. 구간건일의 속셈은 한국인 소작인들의 신분은 소작농 이하이기는하나 임금노동자이상의 것임을 애써 변명하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구간건일의 견해는 진실에서 거리가 먼 것이다. 미국 플랜테이션의 흑인 크러퍼들은 분익소작제도 밑에서 생산물을 농장주와 절반하는 근대적인 소작인의 신분을 지니고 있었다. 일본인 농장주들은 한국인 소작인들로부터 60∼70%의 소작료를 징수할뿐만 아니라 가택료와 전대금의 이자까지 받고 있었으니 실납소작요율은 80%에 가까왔다는 것이 일본인교수의 실태조사에 나타나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일본인 농장들은 한국인 소작인들을 남북전쟁 이전의 흑인노예와 같은 신분으로 얽매어 놓음으로써 농장수익의 극대화에 여념이 없었던 것으로 보지않을 수없다.
노예제도의 본질은 강제노동제도에 있다. 남북전쟁 이전의 플랜테이션들은 노동의 강제강도를 높이기 위하여 순찰제도를 적용하였다. 또한 강제노동제도의 대명사인 갱제도(gang system)를 쓰기도 하였다. 한마디로 흑인노예노동자들은 농장주의 감시밑에서 노동할 뿐이고 언제 식사를 하고, 언제 휴식을 하느냐는 오로지 농장주나 농감의 호령에 따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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