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 이란사태 인질 444일(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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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아프가니스탄의 위기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나는 참모들과 계속 인질문제를 토의했다. 다른 일도 많았지만 내 마음은 항상 인질문제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란에 억류된 한 인질로부터 편지 한통을 받았다. 이 편지는 기막힌 방법으로 이란에서 우편으로 부쳐졌는데 전혀 검열을 받은 흔적이 없었다.
크리스머스 바로 다음날 쓰여진 이 편지는 억류 인질들의 기본적인 인권조차 존중되지 않고 있음을 폭로하고 있었다. 인질들은 햇빛이나 신선한 공기가 통하지 않는 어두컴컴한 방에 억류돼 있으며, 어떤 외부소식도 들을 수 없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두 손은 묶여져 있으며 방안엔 밤새도록 밝은 불이 켜져 있는 데다 시끄러운 소음까지 나 잠을 이룰 수가 없다. 그뿐인가. 같은 방에 있는 동료 인질들과의 대화조차 금지돼 있다는 그런 참담한 내용이 편지를 메우고 있었다. 이 편지를 쓴 인질은 억류 53일 동안에 33일을 딱딱한 마룻바닥에서 잤으며 밖에서 잠시나마 운동을 하도록 허가 받은 것은 겨우 세 차례에 불과하다고 했다.
나는 「밴스」와 「조던」과 더불어 편지내용을 상의했다. 편지는 분명히 진짜였다. 우리는 그 인질의 가족에게 이 소식을 알려주었다. <일기 1980년1월16일>

<기본인권마저 박탈>
얼마 후 이 편지를 쓴 주인공이 노련하고 유능한 국무성관리 「월리엄·오드」라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졌다. 나는 이란 납치자들의 만행에 다시 한번 전율을 느꼈다. 정상적인 사람으로서, 특히 한나라의 지도자로서, 어떻게 무고한 이들을 그렇게 다룰 수가 있을까?
1월14일, 이란정부는 모든 외국기자들을 이란으로부터 추방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은 반가운 소식이었다. 기자들이 축출된다면 그동안 테헤란의 미국대사관 밖에 설치된 TV카메라 앞에서 연일 벌어지던 반미시위가 줄어들 계기가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된다면 미-이란 두 나라 국민들의 감정을 다소나마 누그러뜨리는 효과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란 측이 기자를 추방시킨 뒤 또 무슨 흉계를 꾸밀 것인가 하고 걱정이 되었다.
우리는 이런 북새통에서도 6명의 미국인을 감쪽같이 이란 땅에서 구출해냈다.
우리는 미국대사관이 폭도들에 점거될 때 6명의 미국외교관들이 캐나다대사관으로 은신한 사실을 계속 비밀로 유지하는데 성공했다(일부 보도기관들은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나 내 요청으로 그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다). 이란사태에 관한 보도가 현저히 줄어들고 테헤란 거리도 다소 조용해졌다. 이들 6명의 미국인을 탈출시키는데 적절한 시기가 온 것이었다. 이들을 구출한 이야기야말로 진짜 첩보작전이었다.
나는 미국의 비밀요원들을 극비리에 이란으로 잠입시켰다. 현지에 도착한 이들은 미국인들을 안전하게 탈출시키기 위해 예행연습을 가졌다. 우리 비밀요원들과 구출될 미국인들은 변장을 하고 감쪽같이 위조한 가짜여권을 소지했다.

<요원철수 후에 공개>
물론 이들은 캐나다 혹은 다른 나라에서 온 관광객이나 사업가로 행세해 이란관리들이 속아넘어가도록 충분한 훈련을 받았다. 우리의 이 극비작전이 실행에 옮겨지기까지는 많은 모험이 따랐고 계획이 몇 차례 지연되기도 했다.
이란에 몰래 파견된 미국의 정보요원 한명은 독일사람으로 가장했다.
물론 여권도 가짜였고 이름도 가짜였다. 공항의 입국 검사 때 그의 미들네임을 그냥「H」라고 한 것이 화근이 되었다.
세관검사를 하던 이란관리가 이 정보요원을 갑자기 불러 세웠다.
그는『독일 사람이 여권에 미들네임을 전부 기재하지 않고 약자로 「H」라고만 쓴게 아주 이상하군요』라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 세관원은 가운데 이름을 약자로 쓴 독일인은 처음 본다며 우리요원을 본격적으로 취조하기 시작했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은 이 미국 정보요원은 순간적으로 기지를 발휘했다. 『사실은 우리 부모가 내가 어렸을 때 나에게 「히틀러」(Hitler)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답니다. 그러나 친구들이 너무 놀리는 바람에 2차 대전이 끝난 후에 나는 본명 대신 약자인「H」로 쓰기 시작했어요.』
즉석에서 둘러댄 이 요원의 설명이 조리가 있게 들렸는지 이란관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윙크까지 하면서 그를 통과시켜 주었다.
1월25일 모든 준비가 갖춰졌다. 그로부터 3일 뒤 나는 미국인 6명이 무사히 이란을 빠져나왔다는 보고를 받았다(바로 그날- 1월28일 -「바니-사드르」가 이란의 새 대통령에 당선됐다는 공식발표가 있었다). 그러나 이 구출작전에 참가했다가 이란에 그대로 남아있던 일부미국 정보요원과 캐나다대사관직원들이 모두 이란을 벗어 나오기까지는 이를 비밀에 붙일 수밖에 없었다. 1월31일, 요원들의 철수가 완료되고 난 뒤 이 작전을 공개했다.
「케네드·테일러」주이란 캐나다대사와 다른 용감한 캐나다인 들은 영웅으로 대접을 받았다. 수천만 미국시민들은 오랜만에 들어온 반가운 뉴스에 열광하면서 협조해준 캐나다인 들에게 갈채를 보냈다. 그들은 찬사를 받을만한 충분한 일을 해냈던 것이다.
우리가 비밀요원을 동원한 것은 이일뿐만이 아니었다. 미국과 이란지도자들과의 접촉은 대부분 테헤란주재 스위스대사관을 통해 이루어졌다.
우리는 또 사업상 이란을 자주 여행하면서 그곳 관리들과 접촉을 해오던 아르헨티나 실업인 「엑토르·비알론」, 프랑스 변호사 「크리스티앙·부르게」씨 등을 통해서도 이란 측과 접촉했다. 12월에는 파나마인 들도 이란관리들과 접촉을 시작했으며 그들은 우리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혁명위원 정기접촉>
테헤란에서 두 사람의 모험가들(주 「비알론」과 「부르게」)은 아무런 어려움 없이 「바니-사드르」대통령, 「고트브자데」외상 및 이란혁명위원들과 정기적으로 접촉했다.
이들은 자신들이 고안해낸 간단한 암호를 사용하여 전화로 테헤란에서 직접 워싱턴에 있는 「조던」에게 협상진전상황을 보고하고 미국의 정책에 관한 질문을 하기도 했다. 나는 그들의 역할이 과연 신뢰할만한 것 인가고 의심을 품고 있었지만 그들이 「바니-사드르」와 「고트브자데」의 서명이 담긴 친서를 우리에게 전달하는 걸 보고서야 그들을 믿게되었다.
이 친서는 「비알론」과 「브르게」를 인질석방교섭의 이란측 대표로 지명한다는 내용이었다. 80년초 몇 달 동안 우리는 이들 두 사람의 비밀사절들에게 보다 더 의존하게 되었다. 우리는 이들을 통해 결국 약간의 협상진전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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