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분수대

'시련은 셀프'가 아닌 겨울이었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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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갑작스레 추위가 들이닥치니 몸과 마음이 덜그럭거린다. 한동안 감기 기운에 머리가 띵하더니 어제부턴 오른쪽 어깨가 말썽이다. 하지만 배부른 투정일 뿐이란 걸 안다. 어떤 이들에게 추위는 삶을 위협하는 직접적인 재앙이다. 지난가을부터 회사 근처 한 빌딩 앞에서 박스집을 짓고 잠을 자는 노숙자가 있다. 요 며칠 영하의 추위가 찾아왔는데, 박스집은 아직 그대로다.

 겨울은 가난하고 나이 든 이들에게 혹독한 계절이다. 쪽방촌에 가는 노인들은 작은 전기장판의 온기에 의지해 겨울을 난다. 몇 년 전에는 전기가 끊겨 촛불을 켜놓고 잠이 들었던 할머니와 손주가 화재로 목숨을 잃는 사고가 일어나기도 했다.

2011년 한양대에서 발표한 추위와 노인 사망률 관계에 관한 논문을 보면, 하루 중의 최저온도가 섭씨 1도씩 낮아질 때 65세 이상 노인의 전체 사망률은 0.27%, 호흡기계·심혈관계 질병으로 인한 사망률은 각각 0.52%·0.32% 증가한다. 당연히 그 피해는 주로 빈곤층에 집중된다. 겨울철에 소득의 10% 이상을 난방비로 쓰는 가구를 ‘에너지 빈곤층’으로 칭하는데, 우리나라 전체 가구의 8%에 달하는 약 130만 가구가 이에 해당한다는 조사도 있다.

 ‘사계절이 뚜렷한 아름다운 우리나라’라고 초등학교 때 배웠다. 하지만 이런 통계를 보고 있으면 사계절이 뚜렷한 건 불운이 아닐까 싶어진다. 겨울을 힘겹게 나는 이들을 위한 ‘에너지 복지’에 대한 관심도 아직은 미미한 실정이다. 내년부터 에너지 빈곤층에 연료 구입에 쓸 수 있는 쿠폰이나 카드를 제공하는 에너지바우처(Energy Voucher) 제도가 실시된다고 한다. 하지만 겨울 한 철(12~2월) 기준으로 가구당 10만원 상당을 지급한다니 생색내기에 그친다는 지적이 많다. ‘겨울=불우이웃 돕기의 계절’ 공식도 깨진 지 오래다. 냉기로 가득한 본인의 연말을 챙기느라 주변을 돌아볼 여유가 없어서일 게다.

 지난 주말 방영된 tvN 드라마 ‘미생’에 이런 대사가 나왔다. “시련은 셀프(self)다.” 회사에서의 불합리한 대우를 묵묵히 감내하고 있는 주인공이 체념하듯 내뱉는 말이다. 맞다. 홀로 감당하고 극복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시련이 인생에는 즐비하다. 하지만 이 겨울, 추위로 인한 시련만은 ‘셀프’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체온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온기조차 누릴 수 없어 스러지는 생명이 더 이상 나오지 않도록 서둘러 주위를 둘러봐야 한다. 겨울은 이제 시작이다.

이영희 문화스포츠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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