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병출신|처음 일반병서 하사관·장교로까지 확대6·25때 용맹떨쳐…희생도 커|송요찬·문형태장군등 20여명 장성진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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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지원병들은 처음 모두 일반병으로 복무했다. 그러나 전쟁의 확대에 따라 하사관·하급장교 부족현상을 겪고있던 일제는 곧 한국인 지원병들을 군의 기간요원으로까지 동원하기 시작했다.
지원병3기부터 간부후보생 시험 응시자격을 준 것이다. 1, 2기 출신들은 전쟁말기 재 소집된 후 간부후보생시험을 치른 경우가 많다.
간부후보생시험 갑종합격자는 예비사관학교에서 초급장교교육용 시켜 소위로 임용하고, 을종합격자는 교육 후 하사관으 배치했다.
인력부족현상이 점점 심화되자 나중엔 중학이상 학력자면 본인의 희망과 관계없이 무조건 간부후보 지원을 하도록 강요하기까지 했다.
이같은 경로로 자의, 혹은 타의로 적지 않은 수의 한국인 지원병들이 일군하사관 또는 장교로 철저한 군대실무경험을 샇을 수 있었다.
명령에 대한 절대적 복종, 임무완수의 강한 책임감과 충성심 등이 일반적으로 지원병 출신의 성향으로 얘기된다. 훗날 6·25때 실전에서 특히 용감히 싸웠고 유능한 일선 지휘관으로 활약한 그룹이 바로 이들 지원병 출신들이었다는 평가는 군안에서 공인돼 있다.
지원병 출신으로 건국 후 군의 간부가 된 사람은 장성진급자만도 20여명에 이른다. 만주군·학병과 함께 건군의 3대인맥인 셈이다.
그중 군의 최고계급까지 진급한 사람은 문형태대장(전남 화순). 지원병 2기로 건국 후 육사(2기)를 졸업, 2군사령관·합참의장까지 역임하고 예편후 두차례 국회의원과 체신장관(겸직)을 지내기도 맸다.
4·19때 육삼총장, 5·16후 내각수반을 지내면서 한때 국방장관·의무장관·경제기획원장을 겸임했던 송요찬잠군(군영·충남 청양)도 문장군과 같은 지원병 2기. 중장으로 예편했다.
6·25때 용맹을 날렸고 압동강에 제일먼저 도달했으며 5·16당시 l군단장이었던 임부택장군 (육사1기·전남 나주·소장) 과 5·16후 혁명재판소장을 지낸 최영규장군(육사3기·강원 명주·소장)도 지원병 2기다.
송요찬·임부택장군과 김창룡 암살 사건의 배후인물로 구속됐던 손국은장군(육사2기·경기 화성·헌병사령관·준장). 그리고 치안국장을 지낸 「백두산호랑이」 김종원대령(육사1기·경북·경산)등은 모두 하사관으로 양주·시흥의 훈련소에서 조교로 일하다 해방후 군에 들어왔다. 1연대 창설대 하사관으로 입대, 국군사병으로는 군번1번이 임부석, 2번이 손국은장군이다. 후에 육사를 거쳐 소위로 임관했다.
지원병 1기중에는 함병선(군영·평양·2군단장·중장). 신재직(육사2기·강원 영월·군수기지사령관·소장), 박경원(강원 고성·준장·전강원지사)장군이 있다. 그중 박장군은 내가 일본육사에 다닐 때 하사관으로 육사 조교로 일해 해방 후 함께 귀국한 인연이 있다.
병무청장·국희의원을 지낸 전부일장군 (육사2기·光州·1군단장· 중장), 5·16당시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김진위장군 (육사3기·강원 명주·제2훈련소장·소장), 조재미(육사2기·사단장·준장), 이치업 (군영·서울·육본수송감·준장), 이상국(육사2기·사단장·준장), 김봉철(육사1기·평남·사단장·준잠)장군 등이 모두 지원병 출신의 별들.
저원병 출신들이 6·25때 특히 용감히 싸운 사실은 앞에서도 말했거니와 이 때문에 희생도 많았다.
연대장급 장교만도 9명이 전사했다.
박노규·권동찬·권태순·김영노·김종열대령과 고근홍중령 등이 그들이다.
그중에도 고근홍중령(육사1기)은 6·25당시 10연대장으로 유명한 다부동·영천전투에서 1개연대 병력으로 1개사단을 궤멸시키는 전과를 거둬 배진의 돌파구 열었던 장본인이다. 북으로 진격해가다 중공의 참전으로 청천강 근처에서 중공군대부대와 접전 후 실종됐다.
살았더라면 틀림없이 군의주요간부가됐울 아까운 지훠관물플 많이 잃었지만 그둘의 분전온 6·25 전기간을 통해 국군의 큰 힘이 됐다.
이들이 특히 실전에서 강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전선 등에서 오랫동안 실전 경험을 쌓은 덕분으로 풀이된다. 전투는 역시 「경험」이 제1인 까닭이다.
해방후 학병출신들이 「학병단」을 조직하고 만주군 출신둘이「만주장교단」같은 비공식 즈직을 결성, 뭉쳤던데 비해 지원병 출신들은 전혀 그런 집단적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실제야 어찌됐건 「지원병」이라는 명칭이 떳떳이 내세우기 어려웠고 군의 지휘계통에만 복종해온 생리탓으로 횡적인 연대나 응집력이 약했던 까닭이다. 대부분 개인적으로 국군에 물어왔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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