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맹이 없이 "게이트" 공세만 … 문건 정국에 무기력한 제1야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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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문
정치국제부문 기자

“기자 여러분께서 기자정신을 발휘해서 실체적 진실을 취재해 주시길 당부드린다.”

 지난 2일 새정치민주연합 ‘비선실세 국정농단 진상조사단’이 기자들 앞에 섰다. 조사위원인 진성준 의원은 “저희들에게 한계가 있다”며 이렇게 호소했다. 세계일보가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 문건’의 존재를 보도한 지 닷새째 되는 날이었다. 조사단장인 박범계 의원은 “언론에 보도된 문건을 입수했느냐”는 질문에 “자랑은 아니지만 아직 입수하지 못했다”고도 했다.

 ‘정윤회 문건’ 파문 속 제1야당의 현 주소는 이렇다. 새정치연합은 지난달 30일 지도부 회의를 마친 뒤 이번 사건을 “정윤회 게이트로 명명하겠다”(서영교 원내대변인)고 했다. 게이트란 백과사전에 ‘정치 권력이 관련된 대형 비리 의혹 사건’을 일컫는 용어다. 하지만 용어만 거창할 뿐 제1야당은 지금 구경꾼 신세다.

 ‘만만회’ ‘만만상회’ 등 말의 잔치뿐이다. 8일에는 읍참마속(泣斬馬謖·대의를 위해 측근도 가차없이 처벌함)에 빗대 정윤회씨와 ‘문고리 3인방’(이재만·정호성·안봉근 비서관)을 “읍참회문해야 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근데 그게 다다.

 새정치연합이 지난 7일 정씨를 포함해 ‘문고리 3인방’ 등을 검찰에 고발했을 때도 마찬가지다. 진상조사단이 낸 고발장엔 6가지 혐의가 담겨 있다. 문제는 고발의 근거다. 의혹의 당사자들이 언론 인터뷰를 통해 밝힌 내용이 전부다. 조사단의 한 관계자는 “언론 보도를 제외하곤 우리가 확보하고 있는 자료나 제보가 없다”고 고백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박근혜 대통령이 일요일인 7일 새누리당 의원들과 만나 “찌라시에 나라가 흔들린다”고 말할 때 새정치연합 지도부는 ‘휴일근무’ 체제였다. 대변인만 달랑 출근해 논평을 냈다. 이날 밤 새정치연합 비대위원들은 심야 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참석자에 따르면 모임의 화두는 “2월 전당대회에 출마할 당권 주자들이 언제 사퇴해야 하느냐”였다고 한다. “정윤회 국면에 대한 논의는 거의 없었다”고 했다. 국정운영 책임이 있는 제1야당의 모습과는 거리가 멀다.

 2월 전당대회에서 당 대표가 되겠다는 인사들도 이번 파문과 관련해 눈에 띄는 활동을 하거나 진상조사단을 독려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조사단에 경찰 출신 권은희 의원을 제외한 걸 두고도 뒷말이 많다.

변호사 출신에 지난 6월까지 현직 경찰을 지낸 권 의원은 내심 의욕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막판에 제외됐다. 당 관계자는 “7·30 재·보선에서 패배의 불씨를 제공했다는 것을 고려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정윤회 게이트’ 국면에서 야당은 보이지 않는다. 집단 무기력증에 빠져 있다. 조사단에 포함된 한 의원은 “초선 의원들 사이에선 야당이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고 자조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고 말했다. 그동안 집안 싸움만 하다 보니 자료를 축적하는 데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자기들이 명명한 ‘정윤회 게이트’ 정국을 제1야당은 구경만 하고 있다.

정종문 정치국제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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