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깊이 읽기] 이 시대 좌파는 무엇으로 사는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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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마르크스(왼쪽)·마키아벨리

탈근대 군주론
원제: The Postmodern Prince, 존 산본마쓰 지음, 신기섭 옮김, 갈무리, 429쪽, 1만6000원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공세 앞에 사회주의는 힘을 잃었고, 좌파의 이론은 공중에 붕 떴다. 적막강산의 이 와중에 등장한 이 책은 좌파 이론의 새로운 진화를 보여주는 저술로 평가받은 지난 해 발표작. 미국 매사추세츠주 우스터에 있는 우스터 폴리테크닉대의 철학.종교 교수인 지은이는 실존주의.페미니즘.생태주의.포스트모더니즘 등과의 접목한 '탄력이 붙은 정치학'의 새 언어를 보여준다.

그는 1980.90년대에 득세했던 포스트모더니즘이 문화적 타락을 불러옴으로써 인간해방을 추구해온 좌파 노선에 결정적 해악을 끼쳤다고 질타한다. 그가 보기에 포스트모더니즘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사회운동을 어떻게 조직할 것이냐에 대한 전략의 부재를 드러냈을 뿐이다. 지나치게 개인주의화.파편화됨으로써 변혁의 희망을 저버리게 한 것이다. 그의 희망찾기의 실마리는 20세기초의 정치혁명가 안토니오 그람시.

지은이에 따르면 그람시가 주창한 헤게모니 장악은 오늘날 가장 적합한 투쟁방법이다. 도덕적인 지도력을 제시하고 여러 분야의 이해관계를 하나로 모아 헤게모니를 장악, 새로운 사회질서를 위한 대중지지를 얻는 것이 그 골자다. 철학자 미셸 푸코가 개인의 문화적 실천을 앞세워 기존 체제에 아무런 타격도 입히지 못했으나 그람시는 파편화한 힘의 통합이라는 전략을 제시했다는 게 지은이의 주장이다.

이에 따라 지은이는 특히 낡은 마르크스주의 패러다임을 새로운 총체성 개념으로 대신할 것을 요구한다. 예로 동성애자들에 대한 폄하나 여성차별, 동물학대가 노동자들의 굴욕을 강요하거나 유색인종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야만적 행동과 일맥상통한다는 게 지은이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여성주의 생태학, 동물권리 주장 등 많은 '해방기획'을 하나로 묶을 수 있다는 것이다.

탈근대 군주란 개념의 등장은 바로 이 대목. '세계에 존재하지만 파편화된 해방운동을 하나로 엮은 집단 지성'이라는 뜻이다. 지은이는 특히 오늘날 좌파운동이 계몽주의와 진보의 전통을 잇되 인간중심주의를 넘어 영혼을 지닌 모든 존재의 고통과 억압에 공감하는 삶의 철학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 그람시의 리메이크 작업을 거쳐 어떻게 새로운 시대 새로운 희망일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지은이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오늘날 대중의 아편은 종교가 아니라 소비주의"라며 "한국 좌파는 관료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정부와 맞서는 방법은 알아도 개인주의와 사유화와 값싼 소비재 상품의 이념에 맞서는 법은 아직 깨닫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이 책은 그 '맞서는 법'에 대한 이론적 배경을 제공하려고 시도한다. 지은이는 유대인 어머니와 일본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미국인. 신진 좌파 이론가로 각광받고 있다.

채인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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