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ek& 영화] 아버지 나의 아버지 '인 굿 컴퍼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8면

주연 : 스칼렛 요한슨, 토퍼 그레이스, 데니스 퀘이드
장르 : 드라마
등급 : 15세
홈페이지 :(www.ingoodcompany.co.kr)
20자평 : 직장인에게 던지는 가슴 시린 위안

1990년대 초반이었다. 가수 정태춘이 '아! 대한민국'이란 노래를 불렀다. "그대 행복한가"란 물음을 연거푸 던지며 소시민적인 삶에 안주하는 이들을 돌아보게 했던 곡이다. 그때는 '안전한 삶'에 대한 지향이 왠지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하던 시절이었다. 이른바 '제도권'으로 불리던 사회의 강고한 안전망이 개인용 갑옷으로 여겨졌으니 말이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강산이 변했다. 아니, 강산보다 더 빨리 사회가 바뀌었다. 이젠 세상 어디에도 안전한 곳은 없다. 세계가 거대한 '동물의 왕국'처럼 변화했기 때문일까. 왕국의 사람들은 더 이상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지 않는다. 대신 '어떻게 살아남을까'만 고민한다. 이젠 내 새끼 거두며 오순도순 살고픈 소시민적인 꿈조차 전혀 소시민적이지 않은 세상이 됐다.

이 영화는 그래서 위안이 된다. 정신없이 달려가는 초고속 통신망, 그보다 빨리 변하는 소비자의 취향, 먹고 먹히는 기업의 인수합병. 그 속에서 쏟아지는 구조조정과 정리해고의 불똥을 이리저리 피하며 '오늘도 안녕'을 비는 샐러리맨들에겐 더욱 그렇다. '동물의 왕국에서 쫓기는 신세가 비단 나만은 아니구나'란 동질감이 가슴을 짠하게 쓸어내린다.

'사랑도 통역이 되나요'의 스칼렛 요한슨, '오션스 투웰브'의 토퍼 그레이스가 연인으로 나온다. 그러나 영화는 '뻔한' 로맨틱 코미디로 승부수를 던지진 않는다. 오히려 딸의 남자 친구가 직장의 직속 상관임을 뒤늦게 알게 된 아버지(데니스 퀘이드)에게 초점을 맞춘다.

잘나가는 스포츠 잡지의 광고이사인 댄 포먼은 50대 초반에 정리해고 위기에 놓인다. '사표를 낼까 말까' 고민 끝에 집에 온 그에게 날아드는 소식은 두 가지. 아내는 늦둥이를 임신했고, 큰딸은 뉴욕대 편입학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는 다시 깨닫는다. 주도권은 내가 아니라 회사가 쥐고 있음을 말이다. 포먼은 가까스로 정리해고를 면하지만 새파란 젊은이가 모그룹에서 직속 상관으로 내려온다. 약육강식과 생존, 직장과 개인의 틈바구니에서 포먼의 절망과 희망이 교차한다.

영화는 속도와 생존만을 얘기하지 않는다. 그 속에서 놓쳤던 '삶의 의미, 일의 의미'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물음을 던진다. 그래서 영화는 섬세함과 묵직함,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는다. 21세기 판 '세일즈맨의 죽음', 그게 이런 풍경이 아닐까.

백성호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