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경의 취리히 통신] 국민 절반이 갖고 있는데 … 스위스 총기 범죄율 낮은 이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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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취리히에서 9월 둘째 주말에 열린 청소년 사격대회 현장. [사진 크나벤쉬센 홈페이지]

“탕! 탕! 탕 탕!”

 수많은 인파와 각종 놀이기구의 소음 속에서도 또렷이 들리는 소리. 놀이동산 곳곳에 있는, 목표물을 맞혀 떨어뜨리면 인형을 선물로 주는 간이 사격장의 장난감 총소리와는 확연히 달랐습니다. 소리가 난 곳은 놀이동산 끝에 있는 회색 건물. 입구에 놓인 커다란 상자에서 방음 헤드폰을 꺼내 쓰자 귀청을 찢을 것 같던 총성이 아스라이 멀어집니다. 안쪽으로 들어가니 가로로 200m쯤 되는 대규모 사격장이 펼쳐졌습니다. 배를 깔고 엎드려 반대편 언덕의 과녁을 향해 총을 쏘고 있는 건 죄다 앳된 얼굴의 청소년들이었고요.

 이곳은 ‘크나벤쉬센(Knabenschiessen)’, 즉 ‘소년 사격’이라는 이름의 ‘축제’ 현장입니다. 매년 9월 둘째 주 취리히에서 열리는 크나벤쉬센의 전통은 1889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스위스 전역에서 온 13∼17세 소년 중 ‘사격의 왕(Schutzenkonig)’을 뽑는 겁니다. 1991년부터는 소녀들도 참가할 수 있게 돼 ‘사격의 여왕(Schutzenkonigin)’도 뽑고 있죠. 이들이 쏘는 총은 스위스 군대에서 실제로 사용하는 ‘SIG SG 550’ 모델의 라이플입니다.

 워낭 소리나 어울릴 법한 나라에서 아이들이 총을 쏘다니, 놀라셨을 겁니다.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에 따르면 스위스 국민의 총기 소유 비율은 미국·예멘·세르비아에 이어 세계 4위(100명당 46정)입니다. 인구 800만의 이 작은 나라에 군용 및 민간인 소유 총기가 230만∼450만 정에 이른다고 하네요.

 가장 큰 이유는 군 복무와 관련된 규정입니다. 스위스에서 병역 의무를 지는 18∼30세 남성은 21주간의 기초 군사훈련을 마치고 예비역이 되는데, 예비역은 의무적으로 집에 총기를 보관해야 합니다. 비상상황 시 효율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죠. 이는 ‘무장 중립’을 내세워 온 스위스의 오랜 전통입니다. 예비군 복무가 끝나도 허가증만 받으면 자신이 사용했던 총기를 소유할 수 있습니다. 허가증은 범죄 전력이나 정신질환이 있지 않으면 대부분 발급되죠.

 매년 여름 예비군 훈련기간엔 트램이나 버스에서 군복을 입고 어깨에 총을 멘 젊은 남자를 자주 봅니다. 한번은 동네 이웃인 도미니크 슐츠(36)가 총을 메고 지나가길래 “외국인이 보기엔 좀 무섭다”고 했더니 그가 말했습니다. “스위스에서 초콜릿만큼이나 널린 게 총인데 뭘. 우린 미국인이 아니야.”

 총기가 널리 퍼져 있는데도 관련 범죄가 상대적으로 적게 발생하는 건(미국의 1/7 수준) 도미니크의 말마따나 스위스 문화와 국민성 때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침착하고 이성적인 국민이니 욱해서 사고를 내는 일이 없고, 총기 사용은 개인의 목숨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한 게 아니라 외부의 적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함이니 평소엔 쓸 일이 없다는 거죠.

 틀린 말은 아니지만 범죄율이 낮은 진짜 이유는 딴 데 있습니다. 첫째, 엄격한 법규입니다. 2007년 10월 스위스 연방의회는 일반 가정에서 총탄을 보관하지 못하도록 법을 바꿨습니다. 전방부대 및 헌병대 소속 군인만이 집에 총탄을 보관할 수 있도록 했죠. 이미 지급된 총탄도 반납하도록 해 2011년 3월까지 전체 총탄의 99% 이상이 회수됐습니다. 현재 총탄은 지역별 군수품 창고에 보관합니다. 집에 총이 있어도 총탄이 없으니 불의의 사고가 날 확률이 현저히 떨어지게 됩니다.

 둘째는 스위스의 독특한 직접 민주주의 시스템입니다. 2011년 2월, 스위스 가정에서 군용 총기류를 보유하는 것을 금지한다는 내용의 발의안이 주민투표에 부쳐졌습니다. 2000년대 들어 전에 없던 총기 사고가 몇 차례 발생한 게 계기가 됐죠. 전체의 57%가 반대표를 던져 법이 무산되긴 했으나 아슬아슬한 과반 수치는 주민에게 ‘총기 소유가 언제든 불법이 될 수 있다’는 경각심을 일으켰습니다. 미국총기협회와 같은 이익단체의 로비가 아닌, 주민 개개인의 의지가 법을 바꿀 수 있다는 깨달음이 손에 든 총을 함부로 사용하지 못하게 하는 거죠.

 미국에선 총기 논란이 벌어질 때마다 규제 반대론자들이 스위스를 예로 든다더군요. 그들이 스위스 가정에 보관된 게 총탄 없는 빈 총이란 걸 알고나 있는지 의심스럽습니다. ‘악한 건 사람이지 총이 아니다’라는 그들의 주장에 맞서 이렇게 말해주고 싶습니다. “믿어야 할 건 법이지 국민성이 아니다.”

김진경 jeenkyungkim@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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