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제 몸살|공전하는 국회 재무위 안팎사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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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정계는 아직도 실명제 파동의 여진에 휩싸여있다.
민한당의 불참으로 국회재무위가 연일 공전하고있고 예결위도 난항 끝에 질의에 들어갔지만 초점은 역시 실명제 문제.
민한당은 실명제를 전제로 한 예산안 세법안 등은 실명제를 연기키로 한 이상 모두 재조정해야 한다는 것이고 여당 측의 논리는 심의해가며 수정하자는 것.
○…재무위는 빨라야 내주부터 정상 가동될 전망.
지난 4일 박태준 재무위원장이 여야간사들과 L호텔에서 조찬을 하면서 심의일정까지 합의했다가 민한당의 번복으로 무산된 소위구성문제는 그 이후 한치의 진전도 보지 못한 상태.
재무위원들은 이 문제가 이제는 재무위 수중을 떠나 총무이상의 선에서 타결돼야 한다는 체념(?)을 보이고 있고 총무들은 상임위 일정이니 위원장과 간사들이 책임지고 타결할 것을 종용하고 있어 아직 해결기미가 없다.
민정당은 이런 사태의 주요원인을 민한당의 당내 사정 때문으로 보고있다.
지난 3일 총무회담에서 재무위 문제를 위원장과 간사들에게 위임키로 결정했을 때만해도 문제는 곧 해결될 것처럼 보였었다.
이날 낮에 있었던 이재형 민정당 대표위원과 유치송 총재·유옥우 부총재 등의 접촉에서 원활한 국회운영에 원칙적인 합의가 있었고 고재청 의원 사무실에서 있었던 민한당 재무위원 모임에서도 김승목 의원을 제외하곤 재무위 참여에 모두 긍정적이었었다는 것.
이 같은 재무위원들의 분위기를 김태식 간사가 임종기 총무에게 전달했고 임 총무는 이를 토대로 총무회담에 나가 3당 간사들에게 위임키로 쉽게 결론을 냈던 것이다.
그러다가 4일 상오 열린 총무단과 재무위원 연석회의에서 L호텔 조찬모임의 합의내용은 김승목 의원의 제동으로 백지화되고 말았다.
그러나 재무위 공전이 장기화되자 민한당 일각에선 정부가 법안을 철회할 리도 없고 민정당이 수정안을 내지 않을 바에야 참여해 적극 투쟁을 해야한다는 주장도 서서히 일고있다.
일부 의원들은 정부·여당의 태도와는 관계없이 기획원·재무장관에 대한 인책결의안을 정식으로 국회에 제출하고 실명제연기에 따른 예산안의 수정촉구 등 실질적인 투쟁을 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소위에 불참해 결국 실명제법안을 처리하지 못하게 되면 자동연기가 되어 민정당의 방침대로 실시가 연기되는 것이니 소위에서 민한당 안이 관철되도록 노력이라도 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히 실명제가 연기돼도 직접 세수와 관련된 것은 1백억원 정도라는 정부측 말은 수긍하기 어렵다는 주장이다. △이자소득에 대한 차등과세 △배당소득의 종합과세 범위 조정 △비과세 되는 금융소득 범위축소 △법인이 받는 국채이자 등에 대한 소득공제제도 폐지 △상속세·증여세 세율인하 등으로 생기는 세수감소만 해도 수백 억에 달할 것으로 보고있다.
따라서 내주에 가면 여야의 정치적 절충으로 재무위가 정상화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견해가 민한당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민정당 측도 아직 시일이 넉넉하니 서두를 필요가 없다고 판단, 내주에는 해결될 것으로 낙관.
○…실명제에 대한 민한당의 당 논은 아직까지는 「7·3조치」로 발표된 정부원안지지.
당시 5인 소위(김태식·박완규·홍사덕·이형배 의원)는 절충을 거듭한 끝에 내년 1월 1일부터 실시하되 금융자산에 대한 종합소득과세는 86년부터 한다는 타협안을 만들어 당의 대안으로 확정했던 것.
그러나 5인 소위 안에 대해 표면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현실적으로 문제가 없지 않다는 생각은 많은 의원들이 갖고 있었다.
특히 10월 중순 민정당 내에서 실명제에 대한 재검토 설이 나오기 시작하면서부터 민한당 내에서도 이론이 머리를 들기 시작했고 재무위 정책질의에서 고재청 의원은 「실명제백지화」를 묻기까지 했다.
재무위 소속 9명의 민한당 의원들은 표면적으로는 「당논」(5인 소위안)지지를 외치고 있지만 이영준·손태곤·김재영 의원은 실시연기 쪽이고 박완규·고재청 의원은 단계적 실시를, 나머지 이재근·김문원·김태식·김승목 의원 등이 당 논 적극 추진으로 알려져 의견일치를 못보고 있는 실정이다.
박완규 의원은 조직인으로서 당 논을 따라야 하기 때문에 5인 소위 안을 지지하는 것이지 단계적 실시를 주장한 소신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재무위뿐 아니라 민한당 내에서 실제 사업을 하고 있든가 경제문제에 관심이 많은 의원들은 대부분 실시연기론의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도 명분과 당 논 때문에 침묵을 지키고 있을 뿐이라는게 중논이다.
○…민정당 고위당직자들은 지난 29일 실명제실시연기를 관철한 후 당 내외에서 불지도 모를 역풍에 대비, 계속 조심스런 태도였으나 l주일쯤 경과한 현재 『의외로 국민의 호응도가 좋더라』는 권익현 사무총장 말처럼 느긋한 자세를 되찾은 것 같다.
실명제연기를 관철한 후 민정당이 가장 주력했던 것은 연기 당위성을 당 내외에 납득시키는 홍보작업이었다.
사실 그 동안 일부 당직자들을 포함한 민정당 소속 일부 의원들간에는 『어떻게 돼 가는지 모르겠다. 한 마디로 불쾌하다. 의원총회를 열어 경과를 보고해야할게 아니냐』는 불만도 없지 않았다.
또 일부의원들은 『7·3조치발표 이후 희생을 치를 만큼 치렀는데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처사』라는 의견도 있었던 것.
뿐만 아니라 민정당의 공식발표문이 너무 짧고 완곡해 실제 연기를 한 것인지도 한때 불분명했고 그후 실명제 후퇴에 따른 보완책에 관한 보도가 잇달아 터지자 고위당직자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이재형 대표위원·권익현 사무총장·진의종 정책위의장·이종찬 총무는 각기 몇 개의 상임위 소속 여당의원들을 상임위원장·간사들로 나눠 조찬 등을 통해 배경설명을 소상히 하는 것으로 의총개최를 대신.
고위당직자들은 의총을 열 경우 야당을 자극할 우려뿐만 아니라 무엇보다 일부 의원들의 비판적인 발언이 나올까 봐 우려했다는 분석이 많다.
의원들은 당직자들의 배경설명에 『대체로 당논을 번복했다는 사실에 대한 아픔과 고통은 감내해야 한다는데 공감했다』(권 총장)지만 일부의원은 당 논 번복에 아쉬움을 제기하기도 했다는 후문.
의원들은 틈나는 대로 지역구당원들에게 실명제 후퇴배경을 설명키로 돼있고 진 정책위의장과 김종인 의원 등은 각각 텔리비전(5일)과 신문(3일)등 언론매체를 통해 대 국민홍보에 나서는 등 실명제 후퇴에 따른 마무리작업에 진력.
그러는 한편으로는 실명제실시연기에 따른 보완 문제가 보도됨으로써 정부측을 자극할 것을 우려해 재무위 소속의원들에게 철저 함구령을 내리는 등 보안조치에 신경.

<고흥길·이수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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