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회 100대 드라마 ⑥남북관계] 60. 북핵, 지루한 줄다리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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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이징 4차 6자회담에 참석한 남북한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수석대표가 지난달 26일 전체회의에 앞서 리자오싱 중국 외교부장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왼쪽부터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 우다웨이 중국 외교부 부부장, 리자오싱 중국 외교부장, 알렉산드르 알렉세예프 러시아 외무차관, 송민순 외교통상부 차관보, 사사에 겐이치로 일본 외무성 아시아대양주 국장.

"눈덩이는 굴릴수록 커지는 법이고 조선 문제는 만질수록 더 커지오.”

북핵 문제를 북한 시각에서 다룬 다큐멘터리 소설 『력사의 대하』에 나오는 주인공이 미국대표에게 던진 말이다. 주인공 강석주는 북한 외교부 제1부부장. 미국 대표는 로버트 갈루치 미 국무부 차관보.

두 사람은 1993년 6월 2일부터 북한의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놓고 마라톤 협상을 벌였다. 그 결과 11일 미국의 대북 무력 불사용과 북한의 NPT 잔류 등이 든 공동발표문에 합의했다. 합의 직전 나온 강 제1부부장의 언급은 북핵 문제가 미국이 생각하는 것만큼 간단한 과제가 아니라는 점을 함축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의 입장에선 미국을 굴복시켰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그의 말처럼 북핵 문제는 지금까지 다루면 다룰수록 심각성이 심화되는 양상을 띠어 왔다. 공동발표문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다시 ‘벼랑 끝 전술’로 나와 정세는 다시 엎치락뒤치락했다. 94년 6월 미국이 영변 핵 시설 공격까지 검토했던 북핵위기는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극적 중재로 간신히 수습됐다. 그해 10월엔 북ㆍ미 제네바 합의가 이루어져 1차 핵 위기는 마무리됐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남북 관계에는 빗장이 질러졌다. 당시 외교부 실무자였던 이용준 동북아시대위원회 전략기획국장은 “핵문제가 발등의 불이 된 상황에서 우리 정부가 이의 해결과 남북 관계 개선을 병행하기는 어려웠다”고 말한다. 북핵을 둘러싼 첨예한 북ㆍ미 대립은 한ㆍ미 관계도 꼬이게 했고, 이것이 다시 남북 관계로 파급되는 악순환이 일어났다. 북한의 나진ㆍ선봉지구 개발, 외국인 투자 유치 법령 마련 등 초기 개혁 작업도 빛을 잃었다.
2002년 10월 초 2차 핵 위기가 불거지자 이런 악순환은 되풀이됐다. “핵을 가진 자와는 악수할 수 없다”는 YS 정부와 달리 DJㆍ노무현 정부는 남북 관계 개선도 꾀했지만 ‘핵의 장벽’을 넘어설 수 없었다. 2000년 6ㆍ15 공동선언 이후의 합의 사항은 명맥만 유지됐다. 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은 “이 때문에 남북 관계와 외교 일선에 있는 사람들에겐 하루하루가 ‘고난의 행군’이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고 회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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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2월, 북한이 핵무기 보유를 선언하자 한반도 정세는 기로에 서게 됐다. 북한 관리들은 툭하면 ‘핵을 보유했다’고 위협했다. 미국은 미국대로 유엔안전보장이사회 이관, 해안 봉쇄 검토 등 강경 입장으로 맞섰다. 남ㆍ북, 북ㆍ미, 한ㆍ미 관계가 얽히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국면이 조성됐다.

그러나 북한은 지난 6월 김정일ㆍ정동영 회담을 계기로 새로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중단됐던 6자회담에 참석한 데다 이전과는 비교가 안 되는 협상 의지를 보여주었다. 이는 미국도 인정하고 있다. 남북 관계에서도 진전된 자세를 나타냈다. 이 당시 열린 경제협력추진위원회 10차회의에서 남북은 “민족 경제의 균형적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쌍방이 갖고 있는 자원·자본·기술 등 경제요소를 결합시켜 새로운 방식의 경제협력 사업을 추진해 나간다”는 데 합의했다. 이는 북측이 남한의 일방적인 지원을 받는 데서 벗어나 남한과의 경제협력에 기여할 것이 있다면 기여하겠다는 의지 표명이다. 한마디로 핵문제로 인한 국제적 고립에서 이제는 벗어나야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북한이 궁극적으로 핵 문제에서 결단을 내릴지의 여부는 미지수다. 남북 관계를 진전시키는 것이 북핵 문제를 우회하기 위한 고도의 책략일 수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게 흐를 경우 남북 관계가 일부 진전된다 하더라도 큰 틀에서 원점을 맴돌 수밖에 없을 것이다. 커질 대로 커진 북핵 장막이 걷어지지 않는 한 남북 관계의 대로(大路)는 열리지 않는다. 이는 북한 경제의 붕괴, 한반도 정세의 결정적 긴장 국면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북측은 핵 포기의 결단을 내려야 하고, 남측은 이를 위한 중재력 발휘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오영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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