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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55)-제79화 육사졸업생들(8)|계림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필자가 일본 육사에 입학했을 때는 신입생 2천8백명에 2학년(58기)이 2천명이었다.
그 때는 태평양전쟁이 한참 확대되고 있어 초급장교가 많이 필요했다. 그래서 우리가 입학한 후에도 입교생이 계속 늘어 곧 예과의 전교생은 5천3백명으로 늘었다. 그나마 각 병과로 갈리고 병과는 다시 수십 개씩의 구대로 나뉘어 있었다.
거기에 우리 조선인 9명 (58기 6명, 59기 3명)이 끼여 있었으니 마치 「대해의 물 한 방울」같은 존재라 누가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도 선배들은 용케도 우리를 찾아냈다. 입교한지 1주일도 안되는 어느날 정내혁·최복수(전사), 그리고 총영사와 외무부차관보를 지낸 안광수 (안광호이탈리아대사의 동생) 등 선배들이 우릴 찾아 주었던 것이다.
그후 외출날이면 선배들을 따라 학교 앞에 마련된 계림회 휴게소에 나가 조선인 생도들끼리 어울리곤 했다. 계림회란 일본 육사출신 조선인들의 친목단체었다.
당시 동경에 있던 영친왕은 계림회를 위해 방을 하나 얻어 주고 휴일이면 과자와 과일도 보내주었다.
사관학교 주변엔 일본의 각 현에서 자기네 고장출신 생도들을 위해 만들어둔 휴게소가 있었는데 계림회도 조선인들을 위한 그런 유의 휴게소였던 것이다.
휴일이면 우리는 계림회에 나가 이것저것 실컷 먹어댔다. 그때 우리는 항상 배가 고팠다. 사관학교 급식이 나쁜 것은 아니었는데 한참 나이들이라 모두들 걸신이 들려 있었던 것이다.
사관생도들에게 음주는 금지돼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주로 사먹는 것은 생선초밥이었다. 주머니들을 톡톡 털어 널찍한 쟁반 그득히 주문해 다가 선후배가 마음을 터놓고 마음껏 지껄이고 먹어대면서 회포를 풀고 향수를 달래고 슬픈 상처들을 서로 서로 매만져주었던 것이다.
당시 사관생도 한달 급료는 7원50전이었는데 쌀은 한가마에 6원정도 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계림회모임은 우리에겐 가장 즐거운 잔치였다. 말의 잔치였고, 음식의 잔치였고, 그리고 굶주린 인정의 잔치였던 것이다.
육사에서 휴게소로 가는 길은 내리막길이었다. 우리는 『내려가는 길은 천당길, 오르는 길은 지옥 길』이라고 했다. 언덕만 올라서면 다시 배고프고 고달프고 삭막한 병영생활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일본육사는 예과 2년, 본과 2년의 4년제였고 유년학교는 예과 2년, 본과 3년의 5년제였다. 이것은 당시 대학 4년, 중학 5년의 학제에 맞춘 것이었다.
육사는 원래 예과와 분과가 한 캠퍼스를 썼었으나 중일전쟁이후 학생수가 늘게 되자 이를 분리시켜 서로 왕래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멀리 떨어지게 됐다.
내가 예과 1학년 때 본과에는 57기로 만주군관학교에서 편입해온 박정희전대통령을 비롯하여 이한림장군(군영)과 이준섭씨, 그리고 고인이 된 김재풍·김호량·정상수·김영수선생이 있었고, 56기로는 이형근장군(군영) 과 한강철교 폭파사건 혐의로 사형됐으나 후에 무죄로 된 최창식대령,
그리고 고인이 된 김종석·최정근선생과 만주에서 편입돼온 이주일 (7특) 최창언 (군영) 박림항 (8특)장군과 김민규씨, 그리고 작고한 조영달·최창륜선생 등이 있었다.
만주군관학교는 1939년 장춘(신경)에 세워진 4년제 사관학교다. 일제가 만주사변을 일으킨후 청나라마지막 황제인 만주족의 하의 (일명 선통제·1967년 사망)를 황제로 하여 만들어놓은 만주국의 사관학교이나 그 편제와 교과내용은 일본육사와 똑 같았고 졸업 후엔 일본군과 같이 일제의 대륙침략 전쟁에 동원됐다.
거기엔 중국인·일본인·한국인이 입교됐는데 1941년의 경우 신입생3백80명중 일본인 1백70여명, 중국인 2백여명에·한국인은 단 2명 뿐이었다.
만주군관학교 예과에서 성적이 우수한 한국인 또는 일본인은 일본육사의 본과에 편입시키는 특전이 주어졌다.
이 학교의 제2기생인 박정희전대통령과 1기생인 박림항장군은 예과졸업때 수석을 하여 하의황제로부터 금시계를 상으로 받았고 졸업식 후에는 황제 앞에서 줄업논문을 낭독하는 기회도 얻었다.
나는 예과 재학 때 본과에 와있던 그들을 만나볼 기회는 없었고 어느 날 저녁 예과에 들러 우리 조선인 생도들을 찾아 위로, 격려해주고 간 김영수생도만 한번 보았을 뿐이다. 김영수선배는 김석원장군의 2남으로 박정희전대통령과 같이 졸업했으나 태평양전쟁 때 필리핀서 전사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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