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원 사상 첫 압수수색] 소각했다던 리스트 찾아 … '조율'있었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3면

▶ 서울중앙지검 도청수사팀이 탄 차량이 19일 국가정보원 정문을 빠져나오고 있다. [연합뉴스]

검찰이 19일 서울 내곡동 국가정보원 청사에 대해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검사만 부장검사 포함 8명인 대규모 압수수색팀을 동원했다.

수색 작업은 감청 전담부서인 과학보안국에 집중됐다. 5국→8국→12국으로 이름이 바뀌다가 한때 해체됐고, 인원과 장비가 분산되는 진통 끝에 고영구 원장 시절 재구성된 ○국이 그 대상이다.

감청 장비와 이를 연결해 주는 컴퓨터 보조장치 등 감청 시설을 현장 점검했다. 이 작업엔 국정원 감찰실 직원도 입회했다고 한다. "국정원 자체가 보안 시설인 데다 장비 중 일부는 1급 보안 시설이기 때문"이란 설명이다.

검찰은 이날 감청 장비 개발 계획서와 설계도면, 장비 개발 예산 처리내역, 장비 운용자와 운영 결과 등을 기록한 관련 문서도 다수 압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과정에서 일부이긴 하지만 DJ(김대중 대통령)정부에서 휴대전화 감청을 한 물증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CASS라 불리는 휴대전화 감청 장비의 사용 목록을 압수했다고 한다. 목록에는 휴대전화 감청 대상 리스트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CASS는 휴대전화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 방식으로 바뀌면서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방식이 도입되자 이 방식을 이용한 휴대전화 감청을 위해 국정원이 자체 개발한 장비다. 국정원은 5일 "1998년 5월부터 2002년 3월까지 초보적인 수준의 디지털 휴대전화 감청 장비를 자체 개발, 운용하면서 불법 감청에도 일부 사용했다"고 고백했다.

국정원은 유선 중계 통신망 감청 장치 6세트와 이동식 휴대전화 감청 장치 등을 개발해 사용하다 휴대전화 기술이 CDMA2000 방식으로 바뀌어 감청이 어려워지자 2002년 3월 관련 장비 일체를 폐기했다고 밝혔다. 이 중 이동식 감청장비가 CASS다.

국정원은 발표 당시엔 장비를 폐기하면서 관련 서류도 함께 소각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런데 그중 폐기되지 않고 남은 일부 목록이 이번에 발견된 것이다. 이는 검찰이 국정원의 고백을 뒷받침할 물증을 확보했음을 뜻한다.

감청 리스트에 무슨 내용이 담겼는지는 즉각 확인되지 않았다. 다만 한 관계자는 "주로 밀수.마약.산업보안과 관련된 내용이며 국내 정치와 관련된 부분은 한건도 없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검찰과 국정원이 압수수색에 앞서 사전조율을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검찰이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하거나, 국정원의 모든 비밀이 까발려지는 것은 양쪽 모두에 부담이 된다는 지적도 있다.

검찰이 휴대전화 감청 리스트를 손에 쥠으로써 수사는 탄력이 붙을 전망이다. 이를 토대로 당시 감청을 담당했던 과학보안국의 책임자나 실무자에 대한 본격 수사에 착수할 수 있게 됐다. 특히 DJ 정부 시절 국정원장을 지낸 수뇌부 4명에 대한 수사로 확대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도청 정국도 새 국면을 맞을 전망이다. DJ의 반발을 부른 국정원의 고백이 사실로 확인될 경우 정치권엔 또 한차례 파란이 일 공산이 크다. 특히 국정원 발표를 자신의 도덕성 훼손으로 받아들여 반발하고 있는 DJ쪽 대응이 주목된다.

DJ는 사건 이후 광주 방문, 국정원장의 공동부인 성명 발표 등 강경 대응 방침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감청 리스트가 일부 나온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제 공은 DJ 쪽이 넘겨받은 국면이 됐다.

장혜수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