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승달과 밤배' 지각 개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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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초승달과 밤배'(감독 장길수, 25일 개봉)는 아련한 추억을 일깨운다. 1970년대 바닷가 한적한 마을이 배경이다. 아버지가 다른 남매 난나(이요섭)와 옥이(한예린)의 애잔한 사연이 마음을 울린다. 그러나 최루성 눈물은 강요하지 않는다. 엄마 없이 할머니 밑에서 자란 두 남매의 다툼과 화해가 곱게 펼쳐진다. 깨끗한 수채화 한 편을 앞에 둔 느낌이다.

'초승달과 밤배'는 화려하지 않다. 10억원을 들인 저예산 영화다. 또 마케팅비가 없어 제작 2년 만에 지각 개봉한다. 그러나 공명은 크다. 각박했던 70년대의 틈을 뚫고 나오는 사람 냄새가 살아 있다. 집 나간 딸을 대신에 손자를 키우는 할머니(강부자), 붕어빵 하나도 나눠 먹는 남매, 점심을 못 싸간 오빠에게 '찔레꽃 도시락'을 만들어가는 동생, 부모 없는 아이들을 따뜻하게 보살피는 초등학교 선생님(장서희) 등 살기는 힘들었어도 인정은 마르지 않았던 70년대의 순박한 풍경이 슬라이드처럼 지나간다.

어린 배우들의 연기도 정겹다. 태어난 뒤 잘 먹지 못해 등이 굽은 옥이와 그런 동생을 귀찮게 생각하는 철부지 꼬마 난나가 시간이 흐르면서 하나가 되고, 또 가족의 의미를 깨달아 가는 과정이 '찬란한 슬픔'을 완성한다. 인공 조미료를 치지 않은 담백한 음식을 먹는 것 같다. '충무로의 감초'였던 고 김일우씨도 신문배달 소년들의 월급을 슬쩍하는 보급소장으로 살짝 얼굴을 내민다.

이 영화는 속도와 경쟁의 시대를 잠시 쉬어가는 오아시스다. 그 순박한 영상이 팍팍한 현실을 극복하는 열쇠가 될 순 없겠지만, 그래도 산산이 갈라진 '나와 너'를 하나의 '우리'로 돌아보게 하는 촉매가 되는 건 분명하다.

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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