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한민족을 찾아서] 中. "나는 '코레아노"' - 쿠바·멕시코 한인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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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국가 악보를 들여다보고 있는 쿠바 한인 2세 에스테반 안(한국 이름은 안남산.82)과 알레한드리나 주(주미엽.81) 부부. 안 할아버지는 “젊은 후손들은 고국과 더 가까워지길 바란다”고 말했다 [사진작가 성남훈씨 제공]

"정오 12시에/ 고된 길을 따라/ 작열하는 황폐한 대지 위로/ 노동자 무리들이 돌아온다/사악한 땅에서/ 황색 얼굴과/찢어진 눈초리의/단순한 한국인이 돌아온다."

쿠바 출신 시인 이그나시오 페레스 레케나는 그의 시집 '옛 길의 소나타'에서 쿠바의 한인들을 이렇게 묘사했다. 타는 듯한 이국의 태양 아래서 뾰족하고 억센 에네켄 잎과 씨름하던 멕시코-쿠바 이민 1세대의 모습이다. 조선인 1033명이 1905년 인천항을 떠나 멕시코로 이주했다. 그들은 에네켄 농장에서 피와 땀을 흘려가면서 일을 해야 했다. 그들 가운데 270명은 21년 멕시코의 척박한 삶을 청산하고 쿠바로 옮겨갔다. 사탕수수 농장으로 일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이주하자마자 설탕 값이 폭락하면서 쿠바 한인들은 다시 마탄사스.카르데나스.아바나 등 세 곳으로 흩어져 다시 에네켄 농장에서 일해야 했다. 그리고 84년이 흘렀다. 1세대는 모두 세상을 떠났지만 2~5세가 남아 한인의 뿌리를 이어가고 있다. 현재 멕시코 전역에 3만5000여 명(추산),쿠바에는 600여 명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이국적 눈매를 가진 미술대생 네스토르(21)는 한인 4세다. 몇 년 전 쿠바에 왔던 한국인 선교사에게서 한글을 잠깐 배워 자신의 한글 이름 '김준호'정도는 쓸 줄 안다. 그러나 다른 한국말은 모른다. 한국말은 이민 2세였던 할머니 세대까지만 사용했기 때문이다.

엄밀해 말해 그는 25%만 한인이다. 그렇지만 네스트로는 "내 마음에 흐르는 한국인 피는 70% 이상"이라고 말한다.

네스토르와 같이 70년대 이후 태어난 한인 4~5세는 모두 혼혈이다. 성도 달라졌다. 이씨는 리(Li), 김씨는 킨(Kin)이나 킹(King), 강씨는 칸(Kan, Can)으로 변했다. 이름은 카를로스.안드레스 등 현지식으로 바뀌었다. 쿠바에서 힘들게 번 돈으로 상하이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한글학교도 운영했던 임천택(1903~85)씨의 손녀(35) 이름도 파트리시아다. 그는 "광복 후 쿠바 한인들은 자연스럽게 현지에 동화돼 간 데다 59년 피델 카스트로의 사회주의 혁명 후에는 한국 소식을 접할 수 없어 한국은 완전히 낯선 나라가 됐다"고 말했다.

수도 아바나에서 북동쪽으로 80km 떨어진 마탄스시. 84년 전 멕시코에서 쿠바로 건너간 한인 270명이 집단 이민촌을 세웠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덤불만 무성했다. 파트리시아의 안내로 한 귀퉁이에 서 있는 기념비를 찾을 수 있었다. 이민 1~2세대의 삶을 기록한 것으로 올해 초 세워졌다. 파트리시아는 "이제야 비로소 한글학교와 한인회를 만들어 조국의 문화를 계승하려고 애썼던 조상의 역사를 찾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한국의 발전상이 알려지고, 한국의 전자.자동차 기업이 진출하면서 이곳 한인들도 자신들의 뿌리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6월에는 호세 마르티 문화원에 한글학교가 정식으로 개설됐다. 아바나에서 무역업을 하고 있는 김동우씨가 지난 3년간 지원해온 한글 공부방이 결실을 본 것이다.

엘리자베스(14.여)는 한글학교에서 한국 친구도 사귀었다. 한국 자동차회사 직원인 아버지를 따라온 또래 친구다. 한국인 외할머니를 둔 엘리자베스는 "이젠 한국 이름인 성애리로 불리는 게 더 좋다"며 밝게 웃었다. 그는 한국어 통역이 돼 외할머니의 바람대로 한국과 쿠바를 오가며 살고 싶다고 했다.

쿠바는 북한과는 국교를 맺었지만 한국과는 미수교 상태다. 그래서 북한대사관은 있어도 한국대사관은 없다. 다행히 다음달 KOTRA가 무역관을 신설할 예정이다. 김 카탈리나 추(76.여)씨는 "후세들은 앞으로 한국문화를 마음껏 누렸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아바나(쿠바)=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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