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채업 투명해지나… 대부업체 돈대는 전주들 뭉쳐서 법인 설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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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 임원으로 일하다 퇴직한 김모(60)씨는 대부업체에 5억원을 빌려준 '전주(錢主)'다. 이자로만 생활하는 그는 다음달에 본격 시행되는 개정 대부업법 때문에 전전긍긍하고 있다. 액수와 상관없이 모든 전주를 대부업자로 등록토록 한 법에 따라야 하지만 직접 고객을 상대하자니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른 수입원이 없는 생계형 전주로서 그는 대부업계를 떠날 수도 없는 처지다. 50억원가량을 굴리는 사업형 전주 박모(55)씨도 고민이 많다. 계속 법을 외면하고 무등록자로 음지에서 돈을 굴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지만 강화될 단속이 두렵기만 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깐깐해진 법으로 대부업계가 뒤숭숭해지자 이참에 전주들을 양지로 끌어내려는 움직임이 추진되고 있다. 한국대부소비자금융협회 유세형 회장은 16일 "최근 국내의 주요 전주들과 모임을 열고 '전주 양성화 단체'를 만들기로 했다"고 밝혔다.

모임 결성의 지원군을 자처한 유 회장은 "개인 전주들을 일종의 '도매 법인'으로 만들어 자금조달 구조를 양성화하자는 취지"라며 "일단 3~4명의 전주들이 모여 법인을 만들고, 이런 다수의 법인을 총괄하는 단체가 구성될 것으로 전망한다"고 말했다. 새 단체는 기존 협회와는 구성원도 역할도 다르다. 대부협회가 돈 빌릴 고객을 직접 상대하는 업체로 이뤄진 '소매상'들의 모임이라면, 전주 단체는 대부업체에 뭉칫돈을 대주는 개인들의 '도매상'연합이다. 일단 수십여 명의 전주로부터 출발해 전국의 개인 전주들을 아우른다는 계획이다. 협회는 전국에 1만8000여 개의 대부업체가 있으며 총 12만 명의 전주들이 18조원가량을 굴리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업계가 스스로 팔을 걷어붙인 건 무엇보다 '이러다 공멸한다'는 위기감에서다. 개정 법의 시행을 앞두고 세원(稅源) 노출 등을 꺼리는 전주들이 지하로 숨어들면 대부업의 자금 공급기반 자체가 흔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예금을 취급하지 못하는 대부업체들은 신용도가 낮아 은행 문턱을 넘기가 어렵기 때문에 통상 개인 전주들에게서 자금을 빌려 왔다.

전주들이 법의 테두리에서 도매상 역할을 맡게 되면 대부업체 운영도 보다 투명해지면서 주 고객인 서민들도 불법 고리 등의 피해를 덜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김준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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