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터 회고록『신의를 지키며』(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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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내가 중공과의 교섭을 추진하는 동안에도 파나마운하 조약에 관한 찬반토론은 줄곧 계속됐다. 77년 이른 가을에는 마무리되어지려니 했던 이 문제는 78년도 의회 회기가 시작될 즈음에도 어떻게 결판날지 모르는 미결상태에 있었다. 정부는 조약비준에 필요한 마지막 몇 표를 따내기 위해 전력을 다해야 했다. 게다가 우리는 소련과의 제2단계 전략무기제한회담 (SALTⅡ) 과 포괄적인 중동평화제안 등도 추진하고 있었다. 이밖에도 에너지관계 입법에다 숱한 국내 안건들이 겹쳐 중공문제에 손댈 시간은 거의 없었다. 시기적으로도 말썽의 소지가 큰 또 하나의 문제를 거론하기엔 적당치 않았다.
한편 북경에선 내가 모르는 새에「레너드·우드고크」(북경주재 미 연락사무소장)가「모종」의 성과를 거두고있었다. 78년2윌 정기휴가로 돌아온 그는 중공에서의 답보상태에 관해 짤막하고 관례적인 보고를 마친 후 나와 단둘이만 얘기하기를 요청했다.「우드코크」는 평소의 그답지 않게 매우 들떠 있어서 혹시나 그에게 신상문제가 생겨 현직을 물러나려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까지 들었다.
잠시 더듬거리던「우드코크」는 이윽고 만면에 웃음을 띠며 자기가 북경 우리 외교사절단에서 일하는 미국인간호원과 연애중이며 결혼할 예정이라고 털어놓았다. 그녀의 이름은「샤론·루오이」라고 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루오이」에게 보내는 짤막한 축하편지를 써「우드코크」에게 주었다. 그리고 중국인들과의 교섭에서도 그만한 성공을 거두기 바란다고 농담했다.

<연애중인 우드코크>
「우드코크」는 나에게 중공방문을 권했다. 그러나 나는 중공최고지도자중 한사람이「닉슨」대통령과 「포드」대통령의 중공공식방문에 대한 답례로 미국을 찾기 전에는 중공에 가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있었다.「프리츠」(주= 「월터· 먼데일」부통령의 애칭)와「즈비그」 (주=「브레진스키」보좌관)는 모두 북경에 가고싶어 했지만「밴스」국무장관은 모든 협상이 자기를 통해서 이뤄져야 한다고 고집하고 있었다.
국무성의 직업 외교관들은「닉슨」대통시절안보담당보좌관이던「키신저」가「월리엄·로저즈」당시 국무장관을 따돌리고「닉슨」의 중공방문주선과 상해공동성명 협상에 중심역할을 한데 대해 아직 것 속을 썩이고 있는 듯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에서 가장 저명한 원로정치인의 한사람인「애버럴·해리먼」씨가 나에게 와 소련지도자들이 SALTⅡ협상의 추진을 바라고 있으며 미국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궁금해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들이 우리의 의도에 자신이 없어하는 것은 바로 얼마 전 이디오피아와 소말리아의 싸움에 소련이 끼어 든 데 대해 우리가 아주 거세게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SALT협상이 지연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나는「사이러스·밴스」를 모스크바에 보내기로 결정하는 한편 북경에는 파나마운하조약이 비준되는 대로「브레진스키」를 보내겠다고「밴스」에게 말했다.「밴스」는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내 결정을 받아들었다.
78년5월「브레진스키」는 방중준비를 마쳤다. 나는 그에게 이번 방문에선 어떤 최종합의 타결도 목표로 삼지 말되 미·중공사이의 문제들을 가능한 한 많이 탐색해 보라고 지시했다.
「브레진스키」가 중공을 방문한다는 발표는 북경뿐 아니라 동경·서울·마닐라·대북 등지에서도 주요 뉴스로 다뤄졌다.
아시아나라들도 이번 방문이 실질적인 것이 되리라고 예상한다는 증좌였다.
-「브레진스키」「브라운」「밴스」「먼데일」「조던」(주=「해밀튼·조던=백악관비서실장)등과「즈비그」의 중공방문에 대해 의논한 끝에 중공 쪽만 준비된다면 올해 안에 정상화를 하기로 결정했다. 가능하다면 11월 중간선거 후에 최종절차를 밟는 게 좋을 것이다. 중공과의 관계개선이 SALT협상을 하는데도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은 모두 같았다. (일기·78년5월16일)


소련과의 SALTⅡ협정을 미심쩍어하는 것으로 알려진 몇 몇 상원의원들도 중공과의 유대강화 희망을 나타냈다. 이런 반응을 보고 나는 평화를 위한 두 가지의 움직임, 즉 소련과의 SALTⅡ협정과 대 중공관계 정상화가 한 묶음으로 나란히 추진될 수 있다면 소련 및 중공과의 관계개선에 대한 의회의 지지는 훨씬 더 굳어지리라고 생각했다.
중공문제 외에도 나는 당시 베트남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던 우호의 움직임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결정지어야했다.
78년 초 중공은 미국이 베트남과 접근해 베트남의 정책을 온건하게 누그러뜨리고 소련진영에 끼어 들지 않도록 해주면 좋겠다는 희망을 내게 전해왔다.
국무성은 중공과 동시에 베트남과도 협상하자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국가안보회의(NSC)나 의회 내 우리 쪽 몇 사람의 생각은 달랐다. 언제 건 중공-대만문제를 거론하게되면 일대소동이 벌어질 터인 즉 이 하나만으로도 의사일정은 꽉 차 넘친다는 것이었다.
사실 중공문제는 무엇보다도 중요했다. 몇 주일동안 검토한 끝에 나는 베트남 건은 북경에서 협정이 매듭지어진 뒤로 미루기로 했다. 그나마 그후 하노이 정부가 캄푸체아(캄보디아)를 침공하고 소련 꼭두각시의 빛깔을 띠기 시작하면서 베트남과의 교섭 안은 더 이상 논의되지 않았다.
우리가 베트남의 화친제의에 좀더 적극적 반응을 보였더라면 이런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인지는 내 생각으론 매우 의심스럽다. 하지만 단정할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와 관계가 좋았던 정부를 무너뜨리고 들어선 정권을 승인하느냐의 여부는 국제관계에서 늘 상 되풀이되는 골칫거리다. 이 문제를 아주 해결 짓기 위해 나는 어떤 정부 건 확고하게 자리잡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승인하고 그 정부와 만족할만한 타협이 이뤄지는 대로 곧 대사를 교환하도록 미국의 외교정책을 바꿔버릴까 생각한 적도 가끔 있었다. 물론 한 나라 안에서 두개의 정부가 맞서고 있는 경우엔 우리 쪽의 외교적 판단이 필요할 것이다.
확립된 정부에 대한 자동승인 방침을 택하면 우리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나라에서도 발판을 쌓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긴장을 완화하고 미국의 영향력을 키우고 평화를 북돋울 기회도 얻게될 것이다. 프랑스 등 일부 국가들은 이 같은 정책을 취해 좋은 성과를 거두는 듯하다.
「브레진스키」의 북경 행에 앞서 그와 나는 오랜 시간을 들여 앞으로의 양국관계가 낳을 모든 문제들과 일본·한국·필리핀 등 아시아우방들에 미칠 영향을 검토했다. 우리는 이 우방들이 모두 미·중공관계정상화에서·비롯될 서 태평양의 안정강화를 이득으로 생각하리라고 믿었다. 이 같은 판단은 나중에 외교경로를 통해 이들의 의사를 조심스럽게 타진한 결과 옳았음이 판명됐다.
예를 들어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중공이 북한의 군사행동을 막는데 거들어주고 한반도의 긴장완화를 위해 영향력을 행사해주기를 바랐다.
중공을 친구로 삼아 얻을 수 있는 이득 중 관심을 끄는 것은 그때까지 미국과는 말이 거의 통하지 않았던 몇 몇 제3세계국가들을 은밀히 움직일 수 있는 중공의 실력이었다. 대부분의 혁명정부들은 미국과는 쉽게 손잡으려들지 않았다. 따라서 소련은 종종 아무런 경쟁 없이 주로 무기판매를 통해 새로운 유대를 맺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일부 개발도상국가들에선 중공의 성가가 매우 높았다. 우리는 중공과의 협력관계가 미국과 이런 나라들 사이에 평화와 이해를 북돋울 수 있는 방편이라고 보았다.
5월말 있은「브레진스키」의 북경방문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이때쯤 등소평 등 중공의 새 지도자들은 든든히 자리 잡혔고 우리정부에 관해서도 예전보다 많이 알게 됐다. 게다가 중공은 아프가니스탄의 급격한 정권부심이라든가, 남북 예멘에서의 지도자암살, 소련과 쿠바가 깊게 개입한 이디오피아전쟁, 그리고 중·월 관계의 악화 같은 국제정세의 움직임을 깊이 우려하고 있었다. 이런 요인들 때문에 미국과의 관계개선에 대한 중공의 관심은 더욱 커졌음이 틀림없다.
북경의 지도자들은「브레진스키」와의 전략적·철학적 토론을 즐기는 듯 했으며 교역관계를 발전시킬 의사를 보였다. 그들은「브레진스키」를 통해 중공이 비록 신중한 발걸음으로나마 미국과의 완전한 외교관계수립을 향해 나아갈 태세가 돼있음을 나에게 알려왔다. 「브레진스키」는 최종 협정타결의 임무는 띠고있지 않았지만 다음 단계를 위한 기초작업을 썩 훌륭히 해내고 돌아왔다.
-내가 일리노이주와 웨스트버지니아주 여행을 마치고 워싱턴에 오니「즈비그」가 중국에서 돌아와 있었다. 그는 중국인들에게 압도돼 있었다. 나는 그가 유혹에 빠진 것이라고 말했다. (일기·78년5월26일)
「브레진스키」는 중공에 대한 미국국민들의 태도를 보다 좋게 만들기 위해 중공이 할 수 있는 행동에 어떤 게 있는지 몇 가지 제안을 써주고 왔다.

<아주 국 의사를 타진>
이에 대한 반응에서 우리는 중공의 대미자세를 읽을 수 있었다. 「브레진스키」의 요구사항 중 하나는 미국정책에 대한 끊임없는 공개비난을 멈추라는 것이었다. 중공은 즉각 이를 받아들었다. 6월 들어서는 중공의 관영신문이 내가 아내폴리스 해군사관학교 졸업식에서 한 미·소 관계에 대한 연설전문을 싣고 연설취지를 호의적으로 논평하게까지 했다.
이 신문은 또 사실에서 쿠바가 비동맹국으로 자처하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라고 지적하고 대만문제해결에 관해 조심스럽게 몇 마디 한 후, 중공은 미국석유희사들과의 합작사업을 추진할 계획이라고 공표하고「브레진스키」의 방문이「긍정적」이고「유익」했다고 표현했다.
우리는 북경의「우드코크」에게 앞으로 시작될 공식협상에 관한 구체적 지시사항을 각성해주는 한편 최종 협정문의 우리 쪽 원안도 보냈다.
이때까지만 해도 워싱턴과 북경의 접촉은 앞서 6년 동안의 전례에 따라 이뤄졌다. 그러나 이제는 최종 협정을 목표로 한 실질적인 교섭에 들어가려는 판국이었다. 나는 이 교섭은 비밀히 진행하기로 했다. 한편으론 대만지지자들의 일치된 반대운동을 피하기 위해, 또 한편으론 지나친 기대를 불러일으키지 않기 위해서였다.
이처럼 신중을 요하는 회담을 벌이는 동안엔 등소평에게 명확한 내용의 메시지들을 그것도 내가 직접- 보내는 것도 중요했다.
「우드코크」에게 내린 지시는 다음과 같았다. 우선 회담을 어떻게 진행할지 세부절차를 결정하고, 다음엔 양국정부사이에 맺어질 수 있는 협정전반을 탐색하고, 끝으로 두 나라의 새로운 협력관계에 의해 영향받을 많고 복잡한 국제문제들에 관해 가능한 한 완벽한 합의를 이끌어낸다.
그러고 난 뒤에야 미국과 중공은 외교적 승인에 이르는 마지막 문제들을 협의하게 될 것이었다.
나는 북경의「우드코크」에게 보내는 발표문들의 내용을 한 줄 한 줄 세심히 다듬었다.
대통령으로서 나는 외교를 올바르게 수행해야 할 뿐 아니라 국민과 의회에 대해 내 행동을 옹호해야 했기 때문에 힘닿는 한 흠잡을 데 없는 기록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이 작업을 하는 동안 비밀을 지키기 위해「밴스」국무장관은 그의 사무실을 떠나 백악관에 오곤 했으며 협상에 관한「우드코크」와 우리사이의 연락은 반드시 백악관 안에서만 했다.
북경의 반응은 좋았지만 느리고 단속적이었다. 조심스럽고 오랜 교섭이 여러 달 계속된 뒤 78년11월 나는 우리 쪽 제안의 마지막 부분을「우드코크」에게 보냈다. 그 속엔 중공이 쉽게 받아들일 수 없으리라고 예상되는 3개조항의 정확한 문구가 들어있었다. 3개 조항이란 첫째 미·대만 상호방위조약은 1년간 더 존속시키며, 둘째 대만문제가 평화롭고 참을성 있게 해결돼야 한다는 미국의 성명을 중공은 반박하지 말고, 셋째 미국은 대만과의 방위조약이 소멸된 후에도 대만에 대한 군사판매를 일부 계속한다는 것이었다.
중공과의 관계정상화 날자는 잠정적으로 79년1윌1일로 잡았다.
북경의「우드코크」가 이 메시지를 받았을 때 등소평은 l주일 이상 예정으로 지방 출장 중이었다. 그사이에「브레진스키」와 백악관 중국전문가「마이크·옥센버그」는 등소평이 외국기자에게 했다는. 매우 흥미로운 발언내용을 내게 보고했다.
얘인즉슨 중공은 일본과의 평화우호조약을『단 l초만에』마무리 지었으며 미국과의 관계정상화도 『단 2초면 될 것』이라고 등소평이 말했다는 거였다. 그는 또 자기가 생전에 미국을 방문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고 했다. 등이 북경에 돌아온 후 나는 중공당 중앙위원회가 임시회의를 열 예정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우드코크」와 우리 아시아전문가들은 임시중앙위소집이 매우 의미 심장하다고 판단했지만, 의제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훨씬 뒤에 알게 된 바로는, 이 회의에선 등소평의 당·정부지배권최종확립과 베트남에 대한 군사행동가능성, 그리고 미국과의 장래문제등 세 가지 중요한 문제가 논의됐다.
중앙위 회의가 끝난 후 등소평은 중공 측이 작성한 공동성명 초안을 내게 보내왔다. 그 속엔 미국과 대만의 장래관계에 대해 우리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문구가 들어있었다.
중공은 또「우드코크」에게 12월13일에 있을 다음 번 회담에는 등소평이 직접 나온다고 통고했다. 그때까지「우드코크」는 등과 한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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