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추억] '미국의 목소리' 대변 22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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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미국을 대표해 온 언론인 피터 제닝스가 8일(현지시간)숨졌다. 67세. 영화 007시리즈의 주인공인 제임스 본드를 방불케 하는 얼굴에 믿음직한 목소리로 시청자들의 사랑을 받아오던 제닝스는 4월 5일 뒤늦게 발견된 폐암 치료를 위해 방송계를 떠났었다. 그는 뉴욕 집에서 부인 케이시와 두 자녀가 지켜보는 가운데 영면했다.

제닝스는 미국 ABC 방송의 간판 뉴스 프로그램인 '월드뉴스 투나잇(World News Tonight)' 앵커를 22년간 맡아 오면서 '미국의 목소리'로 불렸다. 그의 별명은 '무게중심(Center of Gravity)'이다. 굵고 차분한 그의 목소리는 뉴스의 신뢰를 담보하는 상징이었고, 해박한 지식은 미국인의 상식을 가늠하는 기준이었기 때문이다. 제닝스는 41년간 일해온 ABC를 떠나면서 지인들에게 보낸 e-메일에서 "좋은 날이 있으면 나쁜 날도 있는 법이다. 내 경우 좋은 날엔 다소 까다로웠고, 나쁜 날엔 많이 까다로웠다"며 자신의 까탈에도 불구하고 도와준 동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부인 케이시는 8일 "남편은 자신이 멋진 삶을 살고 간다고 생각했다. 그는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화롭게 삶을 마감했다"고 말했다. ABC 뉴스담당 대표인 데이빗 웨스틴은 "제닝스는 우리의 동료이자 친구이고 리더였다. 남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방송과 뉴스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제닝스에 대한 미국인의 신뢰는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의 출발은 화려하지 않았다. 그는 방송국 아나운서였던 캐나다인 아버지 덕분에 방송에 익숙했다. 그래서 "공부하기 싫다"는 이유로 고등학교 1학년을 중퇴하고 지방방송국에 취직했다. 뉴스캐스터로 발탁돼 일하던 중 ABC에 스카웃됐다. 이후 역사적 현장엔 늘 그가 있었다. 1960년대 중반 독일 베를린 특파원으로 베를린 장벽이 만들어지는 모습을 현장에서 보도했고, 89년엔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현장도 리포트했다. 유럽.중동.아메리카 대륙 곳곳을 누비는 특파원으로 일하다 83년 '월드뉴스 투나잇'앵커로 발탁됐다. 앵커로 25시간 연속 생방송, 일주일에 60시간 생방송을 기록하는 프로 근성도 보였다. 16번의 에미상을 포함해 거의 모든 미국내 언론상을 휩쓸기도 했다.

오병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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