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북해도어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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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각하의 치적중에 최대악정의 사례로 후세에 남겨질 것입니다.』―
지도위에 직접 평화선을 그었던 장본인인 지철근씨(68·현 북양수산 대표)는 언감생심 대통령의 면전에다 그렇게 말했다 한다.
65년 한일 어업협정이 체결되면서 그 동안의 평화선은 간단히 없어져 버린 것이다.
『하도 기가 막혔던지 박 대통령도 대꾸를 않고 아예 입을 다물어 버리더군요. 그러나 평화선을 너무 헐값에 팔아 넘겼다는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읍니다.』

<믿고 양보한 게 잘못>
10년간의 수산국장을 거쳐 당시 한일회담의 대표로 평화선 수호에 앞장섰던 지씨는 결국 그것 때문에 협상막판에 가서는 대표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의 이야기를 좀더 옮겨보자.
『정말 안타까왔읍니다. 평화선을 그은 이후 일본대표들과 이 문제를 둘러싸고 숱한 논쟁을 벌여왔지만 협상분위기가 무르익어가자 정작 국내에서의 설득이 더 힘들었읍니다.
전관수역 12해리는 협상을 통한 양보라기보다는 일본측의 요구를 그대로 들어준 것이었읍니다. 당초 우리측의 카드는 40해리였었는데 눈앞의 현금에 급급한 나머지 우리의 수산자원을 그냥 내놓은 격이 되고 말았읍니다.
물론 당시에는 미국·영국 등 우방까지도 평화선 고집을 못마땅해했고 일부 국제법학자들마저 여기에 동조한 일도 있었읍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지금은 강대국 자기네들이 먼저 시작해서 2백해리 선포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는 상황 아닙니까.』 어쨌든 한일국교정상화 이후 그들은 우리네 코앞에까지 다가와 마음껏 고기잡이를 해갔다. 그러나 우리 배가 일본연변에 좀 다가가기라도 하다간 금세 난리가 난다. 입장이 완전히 뒤바뀐 것이다.

<최근엔 시기도 제한>
최근 들어 문제가 되고있는 대표적인 케이스가 북해도 어장. 북해도 근해는 풍부한 명태어장으로 77년이후 우리 나라 원양어선들의 주요 조업장이었다. 12해리 밖의 공해상이므로 아무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한국배의 명태잡이가 재미를 보자 즉각 시비를 걸어오기 시작했다. 자원보호라는 명분을 내세워 비록 공해상의 고기잡이도 안 된다고 들고나섰다.
결국 80년10월 양국정부간의 합의사항에 따라 향후 3년동안은 영해구역인 12해리가 아니라 15∼17해리 밖으로 한국어선을 밀어내 버렸고 그것도 조업가능구역의 제한뿐 아니라 면적·시기까지 지정받도록 되어버렸다.
명백히 공해상에서도 조업을 금지당하고 있는 것이다.
예컨대 북해도 서쪽 무라시다이 해역의 경우 모두 14개 해구 중에서 5개만이 4개월간 제한적으로 조업이 허용되고 나머지 9개 해구는 전혀 조업을 할수 없게 되었다.
또 조업허용시기도 안 잡히는 때를 골라서 명태어장인 남쪽의 무로란 어장의 경우 11월부터 3월까지가 성어기인데 한국배의 조업가능시기는 1월중순부터 8월말까지로 되어있다.
그나마 이 지역에서도 일본배가 그물을 먼저 쳐놓은 곳은 한국배가 들어갈 수 없다는 조건을 달아놓았다.
원양업계에 따르면 이처럼 곳곳에 못을 박아놓고서도 일본어선들은 갖가지 야비한 수법을 동원해 노골적으로 한국어선의 조업을 방해하고있다는 것이다.
첫번째 방법은 한국어선이 올만한 데는 잡지도 않는 어망을 공연히 쳐놓고서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수법이다.
심지어 우리 배의 예상항로 앞에 그물을 설치해 일부러 그물을 상하게하고 그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일도 있다고 한다. 원래 약속을 그렇게 했기 때문에 파손시킨 것이 확실히 드러나면 우리 배도 배상요구에 응해왔다.
이렇게 한국배가 일본측에 물어준 돈이 78년4월까지 모두 1억2천만엔. 그이후 1년 사이에도 또다시 5천만엔 이상을 물어줬다.
그래도 정말 찢어져 물어준 것은 덜 억울하다는 이야기다. 전혀 우리선박이 가지도 않은 어장이나 다른 배에 의해 찢어진 것도 한국측에 떼를 쓰며 바가지를 씌운다는 것이 원양업계의 하소연이다.
더 심한 방법은 바닷속에는 전혀 그물을 쳐놓지도 않았으면서 한국배의 조업을 막기 위해 물위에 부표만 띄워놓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어구를 설치해놓지 않고서도 근처에서 조업중인 한국어선이 거둬갔다는 생떼를 쓰기도 한다.

<어획량 30%로 줄어>
한마디로 한국배를 북해도 어장에서 몰아내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곳의 어획량은 77년 14만t, 78년 16만t이던 것이 규제가 본격화되기 시작한 80년에는 7만6천t, 81년은 5만2천t으로 크게 떨어졌다.
금년의 경우는 상반기까지 2만t밖에 잡아올리지 못했다.
어선척수도 77년에는 30척이던 것이 81년들어 17척으로 줄어들었고 최근엔 다시 2척이 북해도 어장을 포기하고 떠나 버렸다.
그럼에도 일본측의 태도는 한국에 대해 상당한 양보를 하고있다고 생색을 내고 있다. 걸핏하면 자기네 국내법에 따라 자원보호를 위한 조업금지구역으로 묶어버리겠다고 얼러댄다.
양국간의 북해도 근해 조업에 관한 잠정합의의 만료시기가 83년10월이니까 이때 다시 어떤 협상이 벌어질지 두고볼 일이다. <이장규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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