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어진 수요일] 청춘리포트 - 무작정 남미 기행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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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13일 볼리비아 우유니 소금사막에서 인도에서 온 안킷 파디아 등 5개국 7명의 청춘이 거인을 피해 도망가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이곳은 소금이 태양의 빛에 반사돼 원근감이 무시되기 때문에 다양한 각도의 사진을 찍을 수 있다.

이런 상상을 해 봅니다. 어느 날 출근길에 부장에게 전화가 걸려 옵니다. “자네, 요즘 왜 이렇게 일을 많이 하나? 오늘부터 보름간 휴가 명령이 떨어졌네.” 우리는 이 상상을 실천에 옮겨 보기로 했습니다. 하던 일을 멈추고 보름간 휴가를 떠나 버리기. 때마침 TV에선 ‘꽃보다 청춘’이란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였습니다. 40대 아저씨들도 떠나는 걸 우리라고 못할까. 청춘리포트팀은 2명의 여기자를 휴가지로 떠밀었습니다. 느닷없이 떠난 휴가에서 그들은 세계 각국의 청춘들을 만나고 돌아왔습니다. 이들의 남미 여행 이야기를 리얼버라이어티 프로그램 형식으로 꾸며 봤습니다. 이름하여 ‘꽃보다 청춘-신문편’. 지금, 시작합니다. 채널 고정!

정강현 청춘리포트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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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남미를 오간 비행기표와 여권에 찍힌 도장.

“탐구휴가제도가 신설됩니다.” 몇 달 전 행정국장의 메일이 도착했다. 기획보고서를 제출하면 보름짜리 연차를 한꺼번에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 “회사가 마음을 바꾸기 전에 서두르자.” 청춘리포트팀의 민경원·채윤경 기자가 재빠르게 휴가 계획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디로? 고민하고 있을 때, ‘꽃보다 청춘’이란 프로그램이 TV에서 흘러나왔다. 가수 윤상·유희열·이적 등 40대 남자들이 남미 페루로 떠난 이야기. “그래, 저기다!” 팀장과 부장 결재를 받기도 전에 두 기자는 남미행 티켓부터 끊어버렸다.

제1화: 해발 4000m에 뚝 떨어지다

고난의 행군을 마치고 와이나픽추에 입성한 채윤경 기자.

지난달 11일. 대기시간까지 무려 38시간29분 만에 볼리비아의 행정수도 라파스에 도착했다. 해발 4000m 고산지대에 자리 잡은 도시. 제일 먼저 찾아온 건 두통이었다. 숙소로 직행해 씻지도 먹지도 않고 꼬박 12시간을 잤다.

 다음날 아침, 관광지인 ‘달의 계곡’에 가기 위해 숙소를 나섰다. 불현듯 덮쳐오는 숨 막히는 고요. 모든 상점이 문을 닫고 거리는 텅 비었다. 그날은 볼리비아 대선일이었다. 해가 지기 전까진 차가 다닐 수 없고 음식과 술도 팔지 않는단다. 해가 떨어지길 기다렸다가 택시를 타고 킬리킬리 전망대에 들렀다. 라파스 야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라고 했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택시기사가 낯선 곳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마을 복판에 있는 무링요 광장이었다. 수천 명의 사람이 모여 3선에 성공한 대통령 ‘에보 모랄레스’를 연호하고 있었다. 에보는 원주민인 인디오 출신 첫 대통령이었다. 대통령 당선 축하 행렬을 바라보는 택시기사의 눈에서 자부심이 반짝였다.

제2화: 사막인 듯 사막 아닌 사막 같은 너

볼리비아 모랄레스 대통령의 3선을 축하하는 현장.

우유니 사막은 라파스에서 버스로 12시간 거리였다. 1만2000㎢에 달하는 소금사막은 건기(4~10월)에는 마른 소금의 속살을 드러내고, 우기(11~3월)에는 물이 고여 하늘빛을 반사한다. 그곳에서 대만·브라질·인도·일본·미국에서 온 청춘들을 만났다. 지프를 타고 종일 같이 다니다 보니 친해졌다. 인도에서 온 컴퓨터 프로그래머인 안킷 파디아(29)는 볼리비아가 107번째 여행 국가라고 했다. 열여섯 살 때 말레이시아를 시작으로 10년간 100개국을 여행했다는 믿기 힘든 이야기.

우유니 소금사막에 비친 그림자를 활용해 인류의 진화를 단계적으로 표현한 모습.

 -어떻게 100개국씩이나 여행한 거야?

 “여행은 시간과 돈이 남는다고 하는 게 아니야. 용기만 있으면 언제든 떠날 수 있어.”

 파디아의 이야기를 들으니 직장을 그만두지 않는 이상 세계일주는 불가능한 거라 여겼던 우리에게도 희망이 보였다. 어느새 소금사막 너머로 태양이 기울고 있었다. 소금 알갱이에 부딪히는 빛줄기들이 장대한 풍경을 그려냈다. 한참을 지켜보던 미국인 네이슨 퍼트넘(29)이 나지막이 말했다. “여행을 하다 보면 희로애락을 느낄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아.” 곁에 있던 이선희(29·여)씨도 한마디 보탰다. “여행하지 않는 청춘이란 읽지 않은 책과 같은 거지.”

제3화: 한순간에 천국에서 지옥으로  

마추픽추에서 라마와 포즈를 취한 민경원 기자.

페루의 마추픽추로 가는 길은 멀고 험했다. 페루와 볼리비아 국경에 위치한 티티카카 호수를 보기 위해 태양의 섬에 들어간 게 화근이었다. 코발트빛 호수에 넋을 잃는 바람에 길을 잃고 말았다. 3시간짜리 트레킹 코스가 7시간으로 늘어났고 결국 나오는 배를 놓쳤다. 마추픽추를 한눈에 볼 수 있다는 와이나픽추 입장권도 무용지물이 됐다. 섬 전체가 와이파이가 터지지 않아서 우리는 전화기를 붙들고 통사정을 해야 했다. 그 순간 코피가 주욱 흘렀다. (젠장, 열통 터진다.) 결국 일부 추가 요금을 지불하고 티켓을 다시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배 타고 2시간, 야간버스로 16시간, 기차로 2시간을 달린 끝에 마추픽추 턱밑인 아과스칼리엔테스에 도착했다. 그런데 마을 전체가 정전이었다. 다음날 아침엔 비까지 쏟아졌다. 비를 맞으며 언덕을 오르고 또 올랐다. 잉카문명 유적지인 마추픽추가 조금씩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비가 서서히 그치고 안개도 사라졌다. 마추픽추를 한눈에 담으면서 우리는 거의 울 뻔했다. 다시 천국이 깨어나고 있었다.

제4화: 지치고 힘든 자, 오아시스로 오라

이카 사막에서 즐기는 짜릿한 샌드보드.

잉카의 도시 쿠스코, 신비한 나스카 라인, 리마의 쾌적함을 지나 와카치나에 도착했다. 와카치나는 이카 사막 한가운데 있는 오아시스 마을이다. 오아시스를 둘러싸고 있는 모래언덕에서 타고 내려오는 샌드보드는 짜릿했다. 호주에서 온 루이스 토빈(25·남)·이자벨 개넌(25·여) 커플은 6개월간 남미를 여행하고 살 도시도 정하지 않은 채 캐나다로 이주한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재미를 위해서”라고 했다. 허기를 달래려 찾아간 중국 음식점에서 한 신혼부부를 만났다. 영국 런던에서 온 애덤 헤스(27)와 캐나다 토론토 출신인 질리언 레이철(27·여)이었다. 둘은 광주광역시에서 영어강사를 하다 만났다고 했다. 한국에서 영어강사로 일하던 이들이 페루에서 우리와 함께 중국음식을 먹고 있다니. 세상 참 좁구나.

#에필로그

지난달 25일 페루 리마 공항. 정확히 보름 만에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남미에서 만난 세계 각국 청춘들의 얼굴이 스쳐갔다. 그들은 낯선 여행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자(勇者)였다. 남미에서 돌아온 뒤 ‘꽃보다 청춘’의 tvN 나영석(사진) PD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는 우리 가슴에 남미 여행의 불을 지른 당사자니까.

 -청춘과 여행은 어떤 관계라고 보세요.

 “‘꽃보다 할배’ 때 할아버지들도 모시고 가봤지만 역시 여행은 청춘이 해야 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청춘의 시기에 여행하지 않으면 정말 크게 후회할 거예요.”

 -왜 남미를 택했나요.

 “청춘이 무작정 떠난다면 남미가 좋지 않을까 하는 판타지가 있었어요. 과감한 결심과 노력이 없으면 닿지 못하는 곳이니까.”

 어쩌면 그 알 수 없는 판타지에 이끌려 남미로 떠나던 순간, 이 기사의 제목은 이미 정해졌다. ‘꽃보다 청춘-신문편’. 나 PD도 흔쾌히 이 제목을 사용해도 좋다고 했다. 신문사 기자로 일하는 동안 ‘꽃청춘’ 시즌 2를 기사로 쓸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으리라, 무작정 믿기로 했다. 어쨌거나 우리는 꽃보다 아름답게 빛나는 청춘이니까.

볼리비아·페루(글·사진)=민경원·채윤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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