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한글 대하소설「삼강명행록」-김기동 교수, 국립 중앙도서관에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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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여태까지의 고전소설과는 그 유형이 다른 독창적 순한글 소설이 발견되어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작품이름은 『삼강명행록』. 모두 31권 4천5백 면에 달하는 대하소설이다. 김기동 교수(동국대·국문학)는 최근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아직 학계에 이름조차 소개되지 않은 이 작품을 찾아내 공개했다.
세조의 왕위찬탈을 소재로 한 검이 특히 관심을 끄는데 작자와 창작연대는 미상-.
김 교수는 이 작품이 ▲17세기 이후의 문헌에 나오는 「가」주격을 사용했고 ▲현재 사용하지 않는 수많은 고어와 특히 「ㅎ」조사를 취하는 특수명사(따히=땅이, 뫼히=뫼가 등)가 많이 나오며 ▲지금까지 발견된 대하소설(『완월회맹연』등 30여종)과 그 문체를 같이 하는 점으로 보아, 18세기 영·정조시대의 작품으로 추정했다.
책의 극기는 각 권이 달라 30×20㎝∼25×20㎝, 각권 평균 1백50여 면의 한글 필사본이다.
작품배경은 중국 명나라.
명태조가 돌아가고 어린 태자가 즉위하니 야심만만한 황숙 연왕이 왕위찬탈을 도모, 왕궁을 점령한다.
나이 어린 건문황제가 자살하려 하나 한림학사 정현 등은 이를 만류, 왕궁을 탈출했다가 기회를 보아 중흥코자 한다. 그들은 황제이하 머리를 깎고 중의 복색으로 궁문을 빠져나간다.
이에 황후는 탈출의 자취를 숨기려고 궁중에 불을 지르고 스스로 황제의 옷을 갈아입은 후 타죽는다.
왕궁을 점령, 황제의 자리에 오른 연왕은 구신들을 잡아들여 항복을 받으려다 듣지 않으니 삼족을 능지처참하는 등 참상을 연출한다. 심지어 아비 앞에서 어린 아들까지 죽이며 항복 받으려는 술법은 마치 수양대군(세조)이 사육신을 죽이는 과정과 아주 흡사하다. 그런 가운데서도 명예와 벼슬을 추구하며 날뛰는 군상들의 모습은 가관이다.
한편 주인공 정한림의 아들 정공자는 원래 영웅의 기상을 타고났거니와 황제를 뒤따르다가 길을 잃고 관군에 붙잡혀 위기에 빠져있던 수많은 충신들을 구출, 운남으로 인도한다.
옛 충신들이 모두 운남에 모여 황제를 받들고 중흥을 도모하려 하나 끝내 천명을 받지 못한다. 천문에 나타난 바 골육상쟁을 피하라는 천명에 따라 천태산에 들어가 지상낙원을 건설, 새로운 왕국을 이룩한다는 줄거리.
김만중이 숙종의 민비 폐위를 풍간 하기 위해 『사씨남정기』를 지을 때 중국 명나라를 배경으로 한 점은 이 작품과 유사하다고 지적한 김 교수는, 이 작품이 바로 비명에 간 단종의 영혼을 위로하려는 뜻에서 썼다고 보고 있다.
그 이유는 우선 ▲우리 고전소설 가운데선 왕손으로서 왕위찬탈을 도모하는 플로트를 가진 작품이 전혀 없을 뿐 아니라 ▲세조가 사육신을 살해하는 과정이나 세조에게 빌붙는 신하들의 행동거지 등이 거의 같게 묘사되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주인공 정공자와 어머니 사부인이 운남길에 나섰다가 황하에서 폭풍을 만나 조선의 청천강 하구 안주의 백상루 앞에 표착, 조선의 경치와 문물을 두루 찬양하며 거기에 새겨진 황보인·김종서 등 6인의 시를 찾아내는 과정에서 정공자가 『이 6인은 모두 동국현상명공이나 황보·김 양인은 반드시 본국(조선)의 환란을 당할 것』이라고 한양을 바라보며 예언하고 있는 점이다.
김 교수는 이 작품이 제목과 같이 삼강을 끝까지 실천하는 인물들의 행동을 통해 유교적인 윤리·사상을 주제로서 드러내고 있으며 특히 세조의 왕위찬탈을 소재로 하면서도 찬탈과정에서 황제가 황숙에게 살해되지 않고 탈출, 새로운 왕국을 세움으로써 비명에 간 단종의 영혼을 위로하려는 뜻에서 쓰여졌다는데 큰 의미가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대부분의 고전소설이 선행작품이나 중국소설을 모방하여 썼는데 반해 이 작품은 완전히 독창적인 플로트와 테마를 지니고 있는 점에서 국문학작품으로서의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설명했다.
연세대 김동욱 교수는 이 소설이 당시 일반화돼 가던 도덕과 가문의식을 반영한 작품 같다면서, 특히 세조의 왕위찬탈과 단종의 죽음을 주제로 한 점은 매우 독창적이며 국문학사상 가치가 크다고 말했다. <이근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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