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 눈덩이 … '강경 카드' 만지작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1면

우리는 날고 싶다
아시아나항공의 객실 승무원들이 3일 충북 보은군의 조종사 노조 농성장을 찾아가 업무 복귀를 호소하고 있다. [뉴시스]

"개별 사업장의 노사분규는 노사자율에 맡기겠다"고 공언한 정부가 아시아나항공 조종사 노조의 파업에 대해 '긴급조정'이란 강력한 카드를 들고 나왔다. 이대로 가다가는 국가 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걱정을 했기 때문이다.

항공사 파업은 재고를 활용하거나 나중에 잔업.특근을 통해 파업기간의 생산손실을 보충할 수 있는 제조업의 파업과는 성격이 다르다.

이미 예약을 한 승객은 업무.관광 일정을 완전히 망치게 되고,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값비싼 항공편을 이용하는 반도체.휴대전화.LCD.PDP 등 고가의 수출품도 납기를 어기는 불상사가 생긴다. '시간 엄수가 곧 돈'인 항공업의 특성상 파업이 길어지면 개별 기업과 국가의 신인도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번 파업으로 아시아나항공은 3일 현재 국내선 1497편, 국제선 81편, 화물기 107편의 운항을 취소했다. 이로 인해 35만여 명의 승객이 항공편을 이용하지 못했고, 2만9400여t의 화물 수출길이 막혔다. 항공사 자체 피해액만 1493억원에 달한다고 사측은 주장한다. 수출 차질로 인한 업계의 손실까지 감안하면 피해액은 더 불어난다.

김대환 노동부 장관이 "조종사 노조의 파업으로 인한 피해가 점차 누적돼 일반 국민과 국가 경제가 감내하기 어려운 정도에 이를 것으로 예상된다"며 긴급조정권 발동 계획의 배경을 설명한 것도 이 같은 항공사 파업의 특성을 감안한 것이다.

특히 조종사 노조의 파업을 아시아나항공 내부 직원들조차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는 점도 긴급조정권 발동을 검토하게 된 배경이 됐다는 후문이다.

실제로 아시아나항공 승무원 등 일반직원 80여 명이 3일 조종사 노조가 농성 중인 속리산을 찾아 노조 관계자에게 업무에 조속히 복귀해 줄 것을 호소했다. 이에 앞서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는 아시아나항공 직원들이 파업에 참여한 조종사에게 '영어공부 좀 더 하라'는 등의 질타가 쏟아졌다.

하지만 긴급조정은 노조의 파업권을 제한할 수 있어 노동계의 큰 반발을 불러올 수 있다. 노동계는 직권중재와 함께 긴급조정 제도를 폐지해야 할 대표적인 악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더욱이 김 장관의 퇴진을 요구하며 노동계가 정부 내 각종 위원회의 근로자위원직을 사임하면서 정부와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긴급조정권을 발동하면 노정 간 정면충돌 사태로 번질 위험도 있다. 김 장관이 긴급조정을 언급하며 노측에 "선 복귀 후 교섭"을 제안한 것도 노사 간의 정면충돌을 걱정해서다.

이 때문에 1963년 도입된 긴급조정 제도는 지금까지 69년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 파업과 93년 현대자동차 파업 등 단 두 차례 발동됐다.

정부는 2003년 7월 현대차 파업 당시에도 긴급조정을 검토하겠다고 선언했지만 노사 간의 교섭이 진행되자 자율적으로 타결될 때까지 발동을 하지 않고 기다린 전례가 있다.

특히 조종사 노조가 파업에 돌입하자 한국경영자총협회 등은 "긴급조정을 내리는 것은 물론 이번 기회에 직권중재 회부가 가능한 필수 공익사업장으로 지정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지만 정작 사측은 긴급조정을 달가워하지 않고 있다.

아시아나항공 관계자는 "첫 단추를 잘못 꿰면 매년 이 같은 파업사태가 되풀이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회사의 신인도는 크게 추락한다. 누가 아시아나항공을 이용하겠는가"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대한항공이 파업했을 때 정부가 나서 잘못 중재하는 바람에 지금도 끌려가고 있지 않으냐"고 덧붙였다. 그래서인지 아시아나항공은 지난달에 큰 폭의 국제선 감편 계획을 발표하기도 했다'죽이 되든 밥이 되든'나쁜 선례를 남기지 않겠다는 얘기다.

하지만 정부는 긴급조정권을 발동해서라도 이번 사태를 진정시켜야 한다는 생각에 변함이 없다. 파업으로 직격탄을 맞는 기업들과 국민의 불만 여론이 최고조에 이르러 정부로서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에 직면할 것이기 때문이다.

노사가 모두 마뜩찮게 생각하는 긴급조정이 발동될지 여부는 이제 아시아나 조종사 노조와 사측의 향후 행보에 달렸다.

김기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