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영 4년반 동안 보고 느낀 노제국의 명암|양념없이 쇠고기 푹 삶은게 최고 요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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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별 시시한걸 가지고 뽐내기를 좋아하는 영국인도 기죽는게 한가지 있다. 음식이다.
영국 서민들이 다니는 식당에 가서 제일 비싼 음식을 시키면 푹 삶은 쇠고기 한 덩어리, 푹 삶은 통감자 두어 개, 푹 삶은 야채 한 덩어리가 나온다. 양념이란 그림자도 찾아 볼 수 없고 모두 맹물에 푹 삶은 것이다. 2천원쯤 하는 이 음식은 소스나 소금을 뿌려 먹는다. 영국 사람들이 식사 후에 반드시 단거을 먹는 이유를 알만하다.
영국인들이 으뜸으로 치는 요리는 로스트비프라는 것인데 이것도 쇠고기를 지방육으로 둘둘 말아서 끈으로 친친 동여맨 다음 오븐에 굽거나 맹물에 푹 삶은 것이다. 양념은 역시 먹을때 치는 소스와 소금뿐이다.
자기들 음식에 대해 열등감을 느끼는 영국인도 로스트비프를 가지고는 가끔 자랑을 하려고 슬금슬금 눈치를 살피는 경향이 있다. 자칫 이쪽에서 순하게 나가면 이들은 얼굴 하나 안 붉히고 이런 소리를 한다. 『음식이란 원래의 맛을 잘 살리는게 생명이지요. 프랑스 사람들처럼 마늘을 넣고 갖은 양념을 쳐서 요리를 하면 쇠고기의 본래 맛이 다 죽지요. 역시 쇠고기 맛은 로스트비프가 최고입니다. 그러나 이 말에 속으면 안 된다. 1066년 정븍자 「윌리엄」이 프랑스로부터 영국에 져들어 온 후에 상류층이 즐겨온 것은 프랑스 음식이었고 지금도 소위 고급 영국음식점에 가면 메뉴가 온통 프랑스어로 되어 있다. 노르만 정복이 있기까지 영어에는 「소」란 단어는 있어도 「쇠고기」란 단어는 없었다. 살아 걸어 다니는 소나 식탁에 오르는 쇠고기를 구태여 구별해서 부를 필요가 없을 정도의 수준에 영국 음식 솜씨가 머물러 있었다는 증거다.
그러나 그건 10세기 전 이야기다. 영국인들은 그 긴 세월동안 푹 삶는 요리법 외에 아무것도 개발하지 못했던가? 이런 반격에 대해 그럴듯한 답변을 들은 적이 있다. 상층계급들은 모두 프랑스 음식에 반해 영국음식을 개발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고 하층계급은 여러가지 맛있는 요리법을 개발했지만 산업혁명 이래 부인들이 모두 공장에 나가 일을 하다보니 요리법을 전수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좋은 요리법이 모두 사장되어 오늘날 푹 삶는 법만 알고 있다는 것이다.
로스트 비프를 거론한 후 또 영국요리가 엾느냐고 재촉하면 십중 팔구는 헤기스라는걸 들먹인다. 이건 원래 스코틀랜드 서민들이 개발한 것인데 가축의 내장을 모아 밀가루 반죽에 싸서 구운 것이다.
쿰쿰한 냄새가 요란해서인지 해기스에는 소스를 치지앉고 대신 스카치 위스키를 친다. 위스키에 밥을 말아먹는 꼴이지만 덕분에 냄새는 잊을수가 있고 술 좋아하는 사람은 먹고나서 음식칭찬을 않으려야 않을 수 없다.
헤기스를 정식으로 서브할 때는 주방장이 직접 나와서 위스키를 부어 주고 자기도 한 잔 따라서 헤기스 접시에 대해 축배를 들고 자기가 마신다.
맛없는 음식을 폼으로 매우려는 영국식당 특유의 음모가 엿보이는 행동이다. 다른 유럽인들처럼 영국인들도 선사시대부터 빵을 먹어 왔는데도 아직 빵맛을 제대로 못내는 것 같다. 도버항에 내리는 영국인관광객들이 쇼핑백에 길다란 프랑스제 빵을 넣고 내리는 모습을 보면 이들이 자기나라 빵맛을 얼마나 불신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영국지방에는 곳곳에 중국음식점이 퍼져 있다. 대개의 지방 중국음식점은 그곳에서 음식을 먹을 수 없고 봉지에 싸서 팔기만 한다. 「테이크 어웨이」식당이란 이름으로 불리는 이 식당에서는 영국인 구미에 맞게 아주 맛없는 중국음식을 전문으로 판다. 외식할 여유가 없는 서민층은 금요일 밤이면 줄을 서서 기다려 이 맛없는 청국요리를 가져다가 온 가족이 모여 앉아 1주일동안 기다려온 주말의 별미를 즐기는 것이다.
근년에 와서 미국의 맥도널드 햄버거가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 전국에 60개소의 연쇄점을 갖고 있는 맥도널드는 아직은 다른 나라에서 만드는 햄버거만큼 맛이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이 음식도 중국음식의 전례에 따라 영국식 무맛으로 바뀌지 않고는 못 배길게 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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