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 게임, 예술과 손잡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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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청담동 미술갤러리‘와이트 월’에 마련된 넥슨의 신작 게임 발표회장. 게임속 캐릭터와 배경을 마치 미술품처럼 전시해 놓았다.

이제 게임은 힘이 세다. 더 이상 천덕꾸러기가 아니다. 매니어만 즐기는 소수의 오락이 아닌, 대중의 놀이문화로 뿌리를 내리면서 얻은 '대중성'이 힘의 원천이다. 그 힘을 빌려달라고 '고급 예술'이 손을 내민다. 게임 역시 스스로 예술적 진보를 거듭하며 힘을 키우고 있다. 점점 자신의 영토를 확장하고 있는 게임의 세계로 자, 클릭 클릭.

◆"너의 힘을 빌려줘"=지난달 30일 오후 7시 서울 호암아트홀에서 열린 국립발레단의 7월 정기공연. 이날 안무가 신무섭씨가 연출한 '남자…1, 2, 3, 그리고'가 시작되자 객석이 놀라움으로 술렁였다. 흔히 사용되는 고풍스러운 무대와 클래식 음악이 아닌, 인기 레이싱게임 '카트라이더'의 주요 장면과 배경음악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신씨는 "남성들의 치열한 경쟁을 보다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평소 즐기던 카트라이더를 떠올렸다"고 말했다. "카트를 타고 숨막히는 레이스를 펼치는 장면 하나하나가 남성들이 사회에서 치열하게 경쟁하는 모습과 비슷하다고 생각했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김나라(21.대학생)씨는 "엄숙하고 지루할 줄 알았던 발레를 카트라이더 덕분에 재미있게 감상했다"고 말했다.

상상밴드는 자신의 노래 '피너츠송'을 홍보하기 위해 동명 게임을 만들어 블로그(blog.naver.com/sangsangband)에 공개했다. 이 게임을 하면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피너츠송'이 자연스럽게 익숙해지게 된다.

얼마 전 막을 내린 극단 '여행과 꿈'의 공연 '쉼,표'는 길거리 농구 게임인 '프리스타일'이 원작이다. 이 게임은 캐릭터들의 힙합패션과 현란한 움직임으로 화제를 모은 올 상반기 최고 히트작. 연극에서는 게임의 동영상과 주제곡에 맞춰 주인공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그대로 재현됐다.

네오위즈의 허은경 팀장은 "게임이 대중의 폭넓은 사랑을 받으면서 단순한 음료.문구.외식업체 등과의 공동마케팅을 넘어서 다양한 장르의 예술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예술적 완성도를 높여라"=넥슨은 신작 게임 '제라'를 지난달 출시하면서 발표 장소로 서울 청담동의 미술갤러리 '와이트 월'을 선택했다. 캐릭터와 원화를 A4에서 전지(A0) 크기로 뽑아내 전시했다. 게임 신작 발표를 갤러리에서 연 것은 넥슨이 처음이다. 넥슨 민용재 사업본부장은 "게임의 원화 및 그래픽의 예술성이 미술 작품에 못지않다는 것을 게이머들에게 알리고 싶어 미술관 전시회를 기획했다"고 말했다.

엔씨소프트가 지난달 28일 조선호텔에서 연 '시티 오브 히어로'의 발표회는 영화 시사회를 능가했다. 개발자들은 대형 스크린을 통해 게임 속 장면들을 직접 시연해 보였다. 엔씨소프트 김주영 팀장은 "최근 게임엔 웬만한 영화보다 뛰어난 화질과 음향이 가미된다"며 "캐릭터들의 역동적인 움직임은 실제 스턴트배우들의 연기를 찍은 뒤 이를 데이터화해 캐릭터에 입히는 모션캡처 기법을 동원했다"고 말했다.

게임의 배경인 음악의 완성도도 점점 높아지고 있다. 판타지 모험게임인 '라키아'의 주제가는 뮤지컬 배우이자 성악가인 김소현과 가수 윤도현이 함께 불렀다. 학원 액션 게임물 '요구르팅'은 코요태의 신지가 직접 부른 게임 OST를 제작해 게임 음악으로는 드물게 라디오 전파를 타기도 했다. 웹젠이 다음달 발표하는 온라인다중접속역할게임(MMORPG) '썬'의 음악은 영화 '반지의 제왕' 주제곡을 만든 하워드 쇼어가 작곡했다. 러시아 국립교향악단이 연주를 맡아 웅장하고 방대한 사운드를 자랑한다.

이화여대 이인화 교수는 "게임 속에는 음악.미술.패션.무용 등 모든 장르의 예술이 등장한다"며 "최근의 추세는 게임이 21세기를 대표할 종합예술로 자리할 것이란 징후"라고 말했다.

장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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