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간도 이주-장호강 <독립군가보급회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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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일본 교과서의 내용
「토지소유관계가 불명확했던 조선에 토지조사사업을 시행하여… . 토지를 잃은 조선인은 소작인이 되거나 일자리를 찾아 일본이나 만주로 유출하였다.」<동경서적「일본사」264페이지>>
『일제의 토지수탈로 문전옥답을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백성들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해 괴나리 봇짐을 싸고 무작정 만주로 떠났지요. 우리 가족은 독립운동을 하시던 아버님이 요시찰인물로 낙인이 찍혀 어쩔 수 없이 고향을 떠났습니다.』
5살 때 고향 (평북 철산) 을 떠났다가 해방 이듬해 독립군으로 귀국했던 장호강 옹 (68·독립군가보급회장).
『만주에서 살아보지 않은 사람은 나라 잃은 설움을 모를겝니다. 내가 7살 때 마적떼의 습격을 받아 우리집이 불타고 온 마을이 불길에 휩싸였지요. 그때의 공포는 지금도 가끔 꿈에 나타납니다.』

<독립운동을 꿈꾸며>
수많은 동포가 일제의 탄압에 못 이겨, 또는 독립운동을 꿈꾸며 비극적인 엑서더스를 했던 곳이 만주 간도.
간도는 1905년까지 우리 땅이었다. 일제는 1909년 한일합병을 위한 하나의 흥정으로「간도협약」을 통해 간도를 청나라에 넘겼다.『일제는 노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만주에 일본인을 이주시켰으나 중국민족의 심한 반발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자 대륙침략의 방편으로 우리를 이용했습니다. 강제 징용·징발에 이어 또 다른 식민지 정책의 하나였지요.』
일제 36년간 만주지방으로 강제로 이민갔거나 독립운동을 위해 두만강을 건너갔던 우리동포는 2백 50만명.
이들 중 아직도 귀국하지 못하고 있는 동포는 1백 30만명에 이른다.
현재 중공의 길림성 동남부지역에 있는「연변조선족 자치주」의 주민이 바로 그들이다.
장 옹의 가족은 3·1운동 때 철산 일대에서 만세사건을 주동했던 아버지 장관선 목사가 왜경에 쫓기게 되자 도강을 결심, 만주 봉천성 통화현 금두하로 이주했다.
『일제는 독립운동을 했던 애국지사들을 붙잡아 못이 촘촘히 박힌 나무 널빤지에 굴렸답니다. 아버님도「105인사건」때 검거돼 3년 동안 옥고를 치르고 나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잡히면 죽는다고 믿고있었죠.』
간도 땅으로 도망친 한국인들은 허허벌판을 개간, 농사를 짓는 일이 유일한 생계수단이었다. 중국인 지주에 농사를 지어 생긴 수확물을 4·6제 (지주가 6할, 소작인이 4할) 로 나누는 식이었지만「자유」때문에 고된 줄도 모르고 맨손으로 밭을 일구어나갔다.

<일제앞잡이 마적단>
그러나 간악한 일제는 만주 땅의 한국인을 편안하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처음에는 한인과 청인 사이를 이간시켜 괴롭히다가 1920년 9월 드디어「혼춘사건」이라는 것을 조작, 간도 땅의 한국인 2만명을 학살하키도 했다.
『만주의 동포를 족치는데 이른바「삼광정책」이라는 것을 동원했습니다.
우리 동포를 무차별 학살하고 (살광), 집을 불태우고 (?광), 약탈 (창광) 하는 등 못된 짓만 골라서 패악을 부렸답니다.』
「혼춘사건」은 일제가 마적단을 매수, 혼춘의 일본영사관을 습격해 놓고 한국인의 소행으로 뒤집어씌워 군대를 출동시킨 조작극이다.
『악명 높은 관동군이 마을에 진주, 젊은 남자는 보이는 대로 살해했었지요. 젊은이들이 산속으로 도망치자 놈들은 부녀자·아이·노인을 가리지않고 살육했습니다. 심지어 임산부의 배를 일본도로 찌르기까지 했지요.』
관동군이 조종하는 마적떼들은 심심하면 우리동포가 애써 개간해 놓은 마을을 노략질하는 통에 간도 주민들은 또다시 유랑길을 떠나야만 했다.
『피에 주린 왜놈들은 뒤를 따르고/괘씸할 사 마적떼는 앞길 막누나/황야에는 해가 지고 날이 저문데/아픈 다리 주린 창자 쉴 곳을 찾고/저녁 이슬 흩어져 앞길 적시니/쫓기는 우리신세가 처량하구나』
간도 땅에 살던 동포들이 부르던「고난의 노래」다.
만주 기독교대학 교목이었던「쿠크」씨도 한국인의 유랑신세를 이렇게 증언했다.
『겨울날 영하 40도의 혹한 속에서 흰옷을 입은 말없는 군중은 10여명 혹은 20∼30명씩 떼를 지어 산비탈을 넘어왔다. 그들은 중국인 소유의 불모지를 괭이와 호미로 일구었지만 생명을 유지하기에는 거의 불가능한 초근목피를 먹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식량부족으로 죽어갔다. 부인·어린이뿐 아니라 청년들도 동사하였다. 수명의 조선인이 맨발로 두자나 깊은 얼음장이 섞인 강물을 건너가서 신을 신는 것을 보았다. 남루한 의복을 입은 여자들이 신체의 대부분을 노출한 채 아기를 업고 간다. 그와 같이 어린이를 등에 업음으로써 피차간에 조금이라도 체온을 돕고자 함이다. 그러나 옷 밖으로 나온 어린이의 다리는 점점 얼어붙어 나중에는 발가락이 맞붙어버렸다.』

<부모형제 만주 땅에>
장 옹도 가족들과 함께 영구·제남·청도 등지로 전전하다가 독립군에 들어가 산동지구 특파단장까지 지냈지만 부모형제를 모두 만주 땅에 묻고 단신으로 해방과 함께 귀국했다.『아마 지금도 만주 땅에 사는 동포들은 그때 불렀던「고난의 노래」를 부르면서 일제의 잔학상을 잊지 못해 몸서리칠 것입니다. 정말 일본은 반성해야 합니다.』장 옹의 이마에서는 땀이 솟았다. <김재봉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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