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 기자의 '이 책은 왜?'] 너무 애쓰지 않아도 돼…마스다 미리표 위로의 특별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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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마 미리(益田ミリ)라는 이름은 한국에서 이제 하나의 장르가 된 듯하다. 2013년 '수짱'이라는 30대 여성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가 한국에 소개된 후 거의 매달 그의 작품이 번역돼 나왔다. 현재까지 스무 권 가까운 책이 출간돼 20만 권 이상 팔렸고, 아직 번역되지 않은 책이 스무 권 이상 남았다니 당분간 이 기세가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열풍은 열풍인데, 시끄럽지 않고 고요하다. 독자들은 '나 이 책 읽고 있어' 호들갑 떨지 않으며 조용하게 움직인다. 독자층도 한정돼 있다. 교보문고에 따르면 마스마 미리 책을 사는 사람들의 87%가 여성이고(13%의 남성 구매자는 어떤 사람들일까 궁금), 89.8%는 미혼이다. 즉, 20~30대 싱글여성이 주 독자층이란 얘기다.

그의 만화에는 결혼하지 않은 여자들의 일상이 센 양념 없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주요 주제는 혼자 사는 것, 결혼하지 않고 나이를 먹는다는 것, 직장인으로서의 고민, 사랑과 연애 등등이다. 누구나 한번쯤은 겪었을 만한 소소한 에피소드, 종일 머릿속을 헤집고 다니는 상념들이 주 내용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한국에도 20~30대 싱글여성을 겨냥한 수많은 책이 나와 있다. 저자들의 일상을 담담히 풀어놓으며 잔잔한 위로를 전하는 에세이도 많다. 그런데 왜 독자들은 그 누구도 아닌 마스다 미리의 책을 집어들까.

마스다 미리의 이야기엔 '젠 체 하지 않는' 미덕이 있다. 읽을 땐 재밌다 생각했는데, 책장을 덮고나면 '뭐야, 잘난 척 하는 거야?" 생각이 드는 책들과는 다르다.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자신의 가장 잘 나온(것으로 추정되는) 사진을 표지에 내세운 책들은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평범한 여자들을 위한 위로라고 하면서 사실은 '오해하지 마, 그렇다고 내가 못생기거나 인기없는 여자는 아니니까'라고 주장하고 싶은 것 같아서다. 싱글여성의 가장 큰 고민인 연애 이야기를 다루면서, 이렇게 저렇게 자신의 매력자본을 확충하라 조언하는 책들도 무수하다. 20대에는 사서 읽고 실천도 해볼 만했다. 그러나 서른이 넘어선 여자들은 이미 지쳤다(물론 다 그런 건 아니겠으나). 어떻게 더 열심히 나를 가꿔야한다는 건가. 이 나이 될 때까지 안 된 걸 이제 와서 바꿀 수 있을까. 지금의 나도 그렇게 나쁜 것 같지 않은데 말이지.

『여전히 두근거리는 중』이란 책에서 마스다 미리는 자신의 중고등학교 시절을 돌아보며 말한다. “인기라고는 약에 쓸래도 없는 청춘”이었다고. 멋있는 축구부 선배에게 방과 후 데이트 신청을 받고 싶었고, 하굣길 패스트푸드점에서의 데이트를 꿈꿨다.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누군가의 소유물처럼 다뤄지고 싶었다…그러나 나를 교실에서 데려가는 남자는 한 명도 없었다. 즉, 집에 돌아가는 타이밍은 언제나 내 마음대로. 온통 그런 일뿐인 내 인생.” 어쩌면 창피했을 경험담을 꾸밈없이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하지만 구질구질하지 않다. 미소가 배어나오는 당당함이다.

최신작인 『여자라는 생물』에서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이런 에피소드. 혼자 여행을 간 그녀에게 민박집 할머니가 묻는다. "그래, 자식은?" 결혼하지 않은 30대라면 한번쯤 맞닥뜨렸을 법한 민망한 상황. "없습니다"라는 그녀의 답에 슬픈 표정을 짓는 할머니. 이 할머니 뭐야. 사람 무안하게. 열 받을 만한 상황인데 그녀는 생각한다. '할머니 인생은 자식이 있어서 행복하셨겠지. 다행이다. 내게도 나만이 아는 행복이 있는데, 그 사실이 누군가에게 전해지지 않는다 해도 별로 상관없을 지도 몰라.'

아마도 그는 '대인배'다. 뛰어난 미인도, 엄청난 재능의 소유자도 아닌 우리도 스스로를 사랑하며 살 수 있다고, 섹시한 여자가, 똑똑한 여자가 되려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고 정갈하고 상큼하게 말해 준다. 진심인지 아닌지는 읽는 사람이 제일 잘 아는 법. 조금 더 노력해보라며 지친 등을 떠미는 자기계발서와 위로한답시고 결국은 열등감만 자극하는 그렇고 그런 에세이들 사이에서 마스다 미리가 건네는 위로는 그래서 특별하다.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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