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징용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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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일본의 평화헌법은 오도된 침략전쟁에 대한 반성헌법이다.
그런데 그 오도된 침략전쟁의 첫 희생자는 누구였으며 또 태평양전쟁의 시발인 대륙전쟁의 도발로 가장 많은 출혈을 강요당했던 사람은 누구였던가. 그것이 누구였는지 알고있다면 반성헌법의 정신으로 보아 먼저 그에 대하여 도덕적 태도를 취할 양심의 표현이 필요할 것이다.
그렇지만, 근래 일본교과서의 내용시비나, 그에 대한 22일의 일본문부성의 해명을 보면 그것은 한국인의 공허한 기대에 불과한 것 같다. 이러한 때 한국인으로서는 냉정한 자세가 요청되지만, 그러나 그의 실상은 알고 있어야 할 것 같다. 그리하여 논란의 하나인 징용의 일단을 요약해 보기로 한다.
1차대전 후의 불황이 1929년의 경제공황으로 나타났는데 이때 일·독·이 등은 군국주의적 통제와 대외침략을 통하여 극복하려고 했다. 일본이 1931년 만주를 침략하는 한편, 군부 정권으로 전환하면서 또 1937년 중일전쟁을 도발했던 것이 그것이었는데 그 침략전쟁은 끝내 세계대전으로 확대되었으니 2차대전이었다.
이럴 때에 이미 일본의 식민지로 있던 한국은 1920년대에는 일제의 경제공황의 제물로서(저미가와 산미증식정책) 또 1930년대 이후에는 침략전쟁의 군수기지로 희생되고 있었다. 그 희생의 단면이 징용이라는 것이다.
처음에는 일제가 한국을 대륙침략의 전진기지로 계획하여 1935년께 군수공장을 이 땅에 상륙시켜 한국인 노동력을 흡수 이용하더니 중일전쟁 후부터는 일본본토에서 노동력 수요가 급증하므로 한국에서의 수요는 미용의 일부와 각종 보국대 동원으로 충당하고, 대부분의 노동력을 일본의 광산이나 공장, 그리고 중국이나 태평양전선의 노무자로 끌고 갔다.
그것이 1939년 10월1일의 「국민징용령」이 의도한 바였다. 이것은 국가총동원법 제4조에 근거한 것인데 동법은 1938년4월1일 법률 제55호로 공포되었고, 동년 5월4일에 칙령 제316호로 조선에 대한 실시령이 포고된 것이다. 필요하다면 물자·사업·인원·단체 등 무엇이나 동원할 수 있게 규정한 이 법이야말로 징용을 비롯한 공출 등의 모법이었다.
때문에 징용령에 위배되면 모법인 국가총동원법 제36조에 따라 처벌되었다.
그런데 징용령은 1939년에 나왔으나 실시는 거의 보류되고 있었다. 『쓸데없는 오해와 마찰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하여 1939년에는 「모집」, l942년부터는 「관알선」, 1944년부터는 「징용」으로 단계적 변화를 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 두 가지 주의할 바가 있다. 그 하나는 이미 194l년부터 군요원으로 징용령을 발동한 사례가 몇 번 있었다는 점과 또 하나는 처음부터 「모집」이란 이름아래 강제수법이 구사되었던 점이다.
모집인원은 사업주의 신청을 받아 후생성에서 사정했고 그에 의하여 조선총독부에서 모집지역인 군·면을 할당하였고, 그 업무는 경찰의 소관사항으로 집행되었다(후에 내무로 변경).
그리하여 일본에서 온 모집원이 『할당지역의 근로동원기관, 경찰서, 면의 노무계를 독려하여 사람들을 수집』했다고 말한 당시 북해도 건설현장의 노무주임이었던 영목린삼의 증언과 같이(『대조』 1971년 9월호) 제도적 절차와 모집방법이 동족간에는 있을 수 없는 기만과 강제를 뒤섞은 것이었다.
그리고 운송중의 탈주를 막기 위하여 『일본에서 데려간 하제자의 굴강한 노무계원이 10명에 1명 정도로 붙어 엄중히 철야 경계하는 가운데 수송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어찌 일본정부가 말하는 자유모집이란 말인가.
제2단계의「관알선」이란 1942년 2월13일 일본내각에서 「조선인 노무자 활용에 관한 방책」이 결정되었고 그에 따라 동 24일에는 조선총독부에서 「선인내지이입알선요강」을 만들어 3월부터 실시한 것인데 이것은 사업주가 총독부에 설치된 조선노무협회의 지도아래 직접 도지사에게 모집신청을 하여 대량 송출토록 한 것이다.
이것을 위하여 총독부에서는 「조선인노무자수송협의회」가 개최되었고, 일본내각에서는 「이입조선노무자훈련급취체요강」을 시달하여 집결현장에서부터 군대식훈련으로 통솔하고, 노무생활도 군대식 기율로 강제하였다.
『그래도 긍정하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일벌백계의 견지에서 취체해온 결과 점차 주효하여 효과를 볼만한 것이 있던 중』(조·선총독부, 『제85회제국의회설명자료』)에 징용을 실시했다고 한다.
이것이 강제가 아니란 말인가. 노무자에 관해서는 조선인을 별도로 규정하고, 국적을 말할 때는 일본 하나로 묶어야 하는가. 또 그 국적의 취득경위가 제국주의침략에 의한 것을 어떻게 합리적 사실로 전제한 위에 논리를 전개한단 말인가.
더구나 교육의 장에서 말이다.
1944년 2월부터 본격화된 징용은 말할 나위가 없다. 당시 전선노무자로 차출한 것은 별도로 징발이라고 했다. 군 노무계에서는 대상자 명단을 만들어 놓고 징용은 면에 인원을 할당했고, 징발은 직접 영장을 발부했다. 여자 정신대라는 것도 여자징용의 성격의 것인데 그 중에 20세전후의 처녀는 전선 위안부로 끌어갔다.
여자의 징발이라고나 할까. 세계역사에서 점령군의 강간사건은 허다했지만 정부군의 작전계획으로 양가처녀를 전선위안부로 배치한 일은 바로 일본뿐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할 것이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일제는 한국의 남녀 l백50만명을 끌어다가 노예처럼 혹사하였다. 이러한 징용을 놓고 형식논리를 앞세워야할 이유가 무엇인지, 특히 한국인은 지켜봐야 할 것이다.
농촌의 처녀를 도시의 사창굴에 끌어다가 만신창이가 되게 만들어 놓고, 그래도 겉치레의 일부가 좋아졌다고, 양장하는 법을 가르쳐 개화시켰다고 망발하는 포주 방식의 제국주의 옹호론도 갖은 모양으로 표출되고 있다는 것을 한국인은 주의하면서 새로운 역사에 대처하는 길을 찾아야 할 것이다. 조동걸<국민대교수·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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